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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초, 그 긴 시간의 멘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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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초, 그 긴 시간의 멘붕
2012 5대 사건, 사상 초유의 생방송 중단, 비디오 판독, 멘붕의 진실
| 김수광 2012-12-29 오전 00:23 [프린트｜스크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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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순한 시간패가 계시원의 추가 멘트와 뒤섞여 규정 해석의 혼란이 일어났고 비디오 판독까지 시행됐던 대국. |
지난 7월 런던올림픽에서 펜싱 국가대표 신아람은 경기 말미에 1초가 영원히 멈춰버리는 오심으로 인해 메달을 놓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사건은 역대 올림픽 5대 오심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신아람 사건의 전말은 워낙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한데 이로부터 약 2달 후엔 신아람 사건과 오버랩 되는 대국 분쟁이 나타나 바둑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었다.‘바둑계의 신아람 사태’ 혹은 ‘비디오 판독 사건’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대국 분쟁이다.
이 분쟁은 어쩌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한하게 꼬이고 꼬이면서 눈덩이처럼 사태가 악화돼 급기야 큰 논란을 일으켰다. 씁쓸한 면도 있었지만 규정 적용의 허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바둑 경기 규정의 해석과 적용 실태에 관하여 곱씹고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12년 한해를 마감하면서 그 대국 분쟁을 기억해 본다.
9월의 KB국민은행 2012한국바둑리그는 정규 시즌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중위권 혼전이 계속돼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한 접전은 매우 치열해지고 있었다. 팀 간 승수 편차가 크지 않아 중위권 팀엔 개인 승수의 의미가 커져 한 대국 한 대국이 귀중했다.
이런 가운데 펼쳐진 홍성지(포스코LED)와 이호범(신안천일염)의 대국에서 시간패 번복이 나타났다. 당시 한국바둑리그 공식사이트의 뉴스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상황은 이랬다. 이호범은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중반, 초읽기 독촉에 쫓겨 좌상귀에 황급히 돌을 갖다 놓았다. 그러나 이미 계시원이 ‘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홍성지는 착수를 멈췄고, 2분 여의 무거운 침묵이 흐르면서 대국은 ‘중단’. 홍성지는 당연히 상대의 시간패라는 무언의 주장을 한 것이었고, 카운트 이내에 착수를 했다고 생각한 이호범은 황망한 모습.
이에 대국을 일시 중단시킨 후 제작진과 양팀 감독이 즉석 회의에 들어갔다. 결국 비디오 판독을 거쳐 ‘열’ 이전에 착수가 된 것으로 인정하고 대국이 재개되었다.
중반 무렵 비교적 유리한 판세를 이끌던 홍성지는 10분 후 재개된 경기에서 후반 끝내기 난조를 보이며 좌변에서 많은 손해를 입어 결국 역전패했다.
이 분쟁을 놓고 경기 운영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한국바둑리그 운영본부는 바둑팬에게 사과하며 대국 분쟁 당시의 정황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며 입장을 밝혔다. 아래는 리그 운영본부가 밝힌 내용이다.
1. 이호범 선수(흑번, 신안천일염)의 마지막 초읽기 상황에서 계시원이 “열”이라는 마지막 카운트를 함과 동시에 이호범 선수 착점.
2. 약 5초 후 계시원이 “아홉과 열을 부르는 속도가 조금 빨랐다. 죄송하다. 경기를 계속 진행해도 되겠냐”고 두 대국자에게 물어봄.
3. 약 1분 간 대국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국 속개라고 판단한 계시원이 백(포스코LED, 홍성지) 초읽기 시작.
4. 홍성지 선수, 곧바로 이의 제기, 초읽기 중단
5.현장에 있는 리그 운영위원(담당PD)은 계시원이 마지막 카운트 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황(해설자의 멘트에 묻힘)에서 경기 진행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감지하고 상황 파악 돌입.
6. 마지막 카운트 진행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있는 도중(약 2분 10초 소요)에 홍성지 선수가 한 수 착점.(추가적인 초읽기 진행은 없었음)
7. 현장 운영위원(담담PD), 시간승 여부 확인을 위해 대국 중단하고 “열”이라는 계시원의 콜이 있었음을 확인하자 신안천일염 이상훈 감독이 “백이 착수했으면 대국 속개에 동의한 것이므로 시간패 아니다.”고 어필.
8. 운영위원, 대국장에서 두 대국자에게 속개 여부 확인, 두 대국자 속개하겠다는 동의를 받고 대국 속개.
9. 포스코LED 김성룡 감독, “감독과 프런트 동의 없이 대국 속개는 부당하다”며 다시 대국 중단 요청.
10. 대국 중단 하고 비디오 판독 실시, 확인 결과 “열” 카운트 보다 착수가 빨랐음을 양측 모두 인정하고 대국 속개하기로 합의.
11. 10분 후 대국 속개, 신안천일염 이호범 선수(흑번) 승리.
본 건을 확인한 한국바둑리그 운영본부는 결국 규정에 근거하여 결론지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참고로 본 건과 관련된 한국기원 및 한국바둑리그의 관련 규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한국기원 바둑 규칙>
제4조 1항 상대방이 반칙을 했을 때에는 즉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대국이 진행된 다음에는 묵인한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바둑리그 대국 규정>
5항 대국분쟁 발생 시 현장에 있는 운영위원이 판단하며, 이의 제기 시 운영위원 장이 최종 결정한다.
압축하자면 규정은 명확했지만 해석을 헷갈렸다고 말할 수 있다.
초읽기 ‘열’이 불리는 순간 시간패라는 것을 모르는 기사는 없다. 전에도 계시원이 칼 같이 열을 불러 시간패가 나온 바 있다. 선수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승복해 왔다. 그런데 이것은 왜 문제가 되었던 것인가.
약간의 변수가 있었다. 열을 부른 계시원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너무 빨리 부른 것 같은데 재개하시는 게 어떨까요?”라며. 예상키 어려운 돌발사태다. 여기에서 혼동이 발생한 것이다.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규정은 명확하다. 돌을 놓는 시점이 열이 나오기 0.000001초 전이었다 하더라도 ‘열’이 불린 이상 시간패다. 마치 초시계를 사용할 때 시간패하면 ‘텐’이 흘러나오면서 “시간패 하셨습니다”라는 기계음이 나오는 걸 연상하면 쉽다. 계시원의 ‘열’이 먼저 였는지 착수가 먼저였는지는 따질 필요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비디오 판독은 불필요했다. 그래서 신아람 사건과는 1초라는 연관성 빼고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현행 규정을 따르자면 그렇다.
그러므로 생방송을 중단하면서 감독들의 요구로 비디오판독이 진행된 것은 판정을 내리는 데 무관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보조심판이랄 수 있는 계시원의 멘트 한 마디가 야기한 규정 해석상의 혼란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감독들도 규정 해석의 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비디오 판독을 마친 양 팀 감독들의 주장이 오고가고 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일이 어떻게 되어야 했을까. 분쟁은 몸집이 커지지 않을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차례차례 맞물려버리고 말았다.
첫째, 계시원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 “초를 읽는 것(대국 개시가 포함되기도 한다)”외에 대국에 관해서 어떤 멘트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다.
둘째, 계시원이 대국 재개 제의를 했더라도 이호범은 패배를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이호범이 규정에 대한 해석을 명확히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중엔 보면 감독들도 헷갈리는 상황이다. 이호범이 헷갈렸을 수 있겠다.
셋째, 이호범은 머릿속이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황이고 홍성지는 이의 제기까지 해서 초읽기까지 중지시킨 상황. 홍성지는 뚝심으로 리그운영본부 측의 판정을 끝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다만 홍성지의 착수 재개는 리그 운영본부 측의 판정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심리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넷째, 홍성지가 리그 운영본부 측의 판단을 죽음 같은 침묵을 견디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운영 본부는 빠르게 대국실(스튜디오)로 들어가 시간패 판정을 내려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현장 운영위원(담담PD)는 두 판이 동시에 진행되는 대국 생방송을 지휘하느라 이호범vs홍성지 판의 상황을 뒤늦게 인지했다. 또 입회인은 아예 없었다. 결국 시간패가 번복되고 말았다.
결국 후속 조치로 계시원은 교체되고 담당 피디는 징계를 받았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입회인 지정 운영’이었다. 이 분쟁 이후의 한국바둑리그 대국에는 입회인이 빠짐없이 나와 활동했다.
입회는 원래 있는 제도다. 대국 개시 선언을 하는 외에도 심판의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하나 대국 개시 후 사진 촬영 때만 대국자와 같이 있고 나머지 시간엔 대기실이나 검토실 등 다른 공간에 있어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입회인이 분쟁의 현장을 눈에서 놓친다면 어느 정도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대국이 스튜디오 대국인 것도 아니고 따라서 영상이 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고 입회인을 계속 대국실 안에 앉혀 놓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보다 확실한 방안은 없을까. 우선은 즉석에서 양자간 해결이 빠르게 될 수 있게 규정집에 세부 조항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이것으로 해결 안 될 경우를 대비해 이중 삼중의 안전망을 만들어 놓는 것이 하나의 방향이 아닐까 싶다.
이호범과 같은 팀이었고 주장이었던 이세돌은“규정에 따라 명백한 이호범의 시간패였다”라고 말한 뒤“하지만 계시원이 열을 부른 순간 시간패라고 하는 지금의 규정 자체는 좀 모호해 보인다”라며 “계시원이 사라지고 선수가 초시계를 누르는 시대가 온 것 아닐까”라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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