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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패빅이 발생하면서 무승부를 확인한 이세돌(앞쪽)과 구리. 구리는 격전을 치르느라 허기가 진 듯 배를 감싸쥐고 있다. |
프로기사의 대국에서 3패빅(무승부)이 나올 확률은 평생 1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로 희소한데 4패빅은 더 드물다.
흑백이 번갈아 패를 따내기를 무한반복하며 순환하기에 4패빅이 등장하면 바둑은 무승부가 된다. 4패빅이 나온 사실 자체가 승리를 떠나 기사 자신에게 진기한 체험임이 틀림없다. 지난 9월에 세계대회 본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출현했다.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中)이 벌인 201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32강전에서다. 4패빅은 예선에서는 간혹 등장한 바 가 있었고 이벤트 대국이나 국내기전 본선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지만 20년 넘게 열려 온 각종 세계대회의 본선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4패빅을 만들어 낸 기사들 또한 공교롭게도 한국과 중국의 양대 거장 이세돌•구리다.
삼성화재배의 32강전은 더블일리미네이션 방식으로 치러진다. 4명이 1조가 되어 2승을 거두는 2명이 16강에 진출한다. 이세돌과 구리는 같은 조에 배정되어 나란히 1승씩을 거두고 있던 상황에서 2라운드에서 만났다. 나란히 1승씩을 하고 있던 두 기사 모두 깔끔하게 빨리 2승 1패가 아닌 2승 무패로 일찌감치 16강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터이다.
우변 상황은 이세돌에게 아주 불리하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이세돌 대마의 명이 끊길 것 같았고 실제로 검토실에선 천하의 이세돌이라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이세돌은 절묘한 타개책을 꺼내들었고 오히려 우세한 흐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때 대마가 서로 얽히더니 드디어 4패빅이 자태를 드러낼 조짐을 보였다.
이세돌은 완연한 우세여서 선택권을 쥐고 있었다. 4패빅을 해서 무승부를 만들어도 되고 4패빅이 얽힌 대마를 양보해도 우세한 국면이었다.
▲ 우변에 4패가 나 순환하고 있다. 이로써 무승부.
▲ 4패를 양보해도 이세돌(백)이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로 따내는 시점에 이세돌이 백1로 빵따냄을 하면 4패는 사라지고 대마를 구리가 접수하게(2) 된다. 그러면 3까지. 이세돌이 4패를 하지 않는 여유를 부렸다면 이 대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양보할 수 있었을까
2003년 흑기사 김승준과 류재형의 기성전 4강전은 4패빅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세한 국면이었지만 김승준이 약간 앞선 형세. 무려 1시간을 철저하게 형세판단을 해 본 김승준은 반집을 이길 수 있겠다고 확신한다.
찜찜하다면 4패빅 쪽으로 방향을 틀어 무승부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김승준은 굳은 확신 속에 반집승을 향해 걸어갔다. 결과는 반집패.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막상 실전에서 양보하는 것은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세돌로서도 대마를 포기하는 모험을 감행하긴 쉽지 않았을 터다. 결국 바둑은 무승부가 되었다.
▲ 세계대회 본선 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재대국. 재대국의 승자는 구리였다.
재대국 제한시간은 1시간
한국기원은 재대국의 경우 무승부 대국이 일어난 당일 치뤄야 하며, 제한시간 1시간 이상의 대회인 경우 1시간을 적용토록 규정에 적시한다. 재대국에서도 제한시간을 원래대로 2시간 60초 5회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이세돌과 구리는 재대국이 끝날 때쯤 기진맥진할 것이다.
제한시간 1시간도 만만치는 않다. 이긴다면 몰라도 재대국에서 지는 사람의 경우 무척 심신이 피로한 상황(실신할 지경이 아닐까)에서 다음 날 3라운드를 맞이해야 한다. 이런 이유를 들어 구리는 추첨으로 승패를 결정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중국 관계자를 통해 전했다. 일리는 있었지만 재대국 규정이 이미 있었으므로 주최측이 이를 거부해 구리의 의견은 실현되지 않았다.
재대국이 시작되기 전까지, 피곤에 지친 대국자들을 고려해 1시간 가량의 휴식 시간이 제공됐다. 이 시간 이세돌은 컵라면 등 간식을 먹었고 구리는 근처 레스토랑을 찾아 식사를 했다. 점심시간이 없는 삼성화재배 대국에서 기사들은 허기가 진 채 바둑을 둔다.
재대국에선 이세돌이 승기를 잡았는데 후반 구리가 이세돌의 허점을 파고들어 역전승했다. 패한 이세돌은 다음 날 일본 대표 장쉬를 꺾고 2승 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나중에 이세돌은 구리와 결승에서 다시 만나 승리하면서 우승을 달성했다. 구리는 재대국에서 승리했지만 이세돌은 결승 최종국에서 승리했다. 최종국의 운명을 가른 집 차이는 반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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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패빅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