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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김인과 더불어 스러진 바둑 낭만의 시대…조남철 선생에 대한 회고
국수 김인과 더불어 스러진 바둑 낭만의 시대…조남철 선생에 대한 회고
안영이 육성증언 (6) 바둑과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인과 국수
[기획/특집] 정용진  2023-10-02 오전 10:01   [프린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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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이 선생이 제공한 추억의 사진, 마치 그 시절의 시간이 멈춰 있는 듯, 귀한 사진이다. 82년 7월 설악산 권금성에 모여 목을 축이고 있는 바둑인들. 왼쪽부터 권경언, 박치문, 조훈현, 안영이, 오른쪽 맨 앞이 김인 국수다. .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입니다. 올초 설연휴 기간 1,2회 게재한 데 이어 나머지 원고를 이번 한가위 연휴에 연재합니다. - 편집자 註

○● 안영이 육성증언 (1편)/ 일본 본인방에게 ‘정선’으로 두라는 통고에 한국 국수는 ‘사퇴서’를 썼다!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2편)/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3편)/ 國手 김인의 처음과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안영이!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4편)/ 한국바둑 60~70년대는 가난했으되 희망이 용솟음치던 시절이었다!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5편)/ 한국바둑계가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둘로 갈라섰던 이야기 ☜ 클릭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승부에 담백했던 기사, 김인

- 선생님이 보시기에 김인 국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혹 있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좁게 한마디로 평가할 순 없고 좀 넓게 보면, 조남철 선생이 전체적으로 우리 바둑계를 이끌었잖아요? 그렇다면 그 뒤에 올곧은 기사 정신, 기둥으로 삼을만한 표상이 김국수였다고 봐요. 바둑뿐 아니라 인간사에서도 시야가 넓어요. 아주 정확하죠. 전체를 보는 눈, 남을 배려하거나 경우가 분명한 사람이었어요. 전성기에 조남철만이 유일한 대항마였지만 그러나 그는 저무는 해였고 그 뒤로 사실상 추월할만한 기사가 한동안 없었잖습니까. 조훈현이 올 때까지 적수가 없다 보니 정상에 오래 머문 자의 허무 같은 걸 느꼈을 거라고 봅니다.

‘승부에 담백했던 기사’라 하고 싶네요. 구질구질하게 이기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한 승부사였죠. 손님 실수 바라는 따위는 애초 없어요. 내가 잘 둬서 이겨야 진정한 승리라 여겼어요. 최고위 타이틀이 걸린 도전기 최종국에서 도전자 강철민 四단에게 단 80수 만에 돌을 거둔 일화가 김국수의 승부사적 성정을 보여준 대표 사례죠. 우승상금이 얼맙니까? 승리와 돈 앞에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한판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로지 명국을 남기겠다는 승부사 정신을 앞에 세우지 않고서야 행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흔히 이긴 자가 강한 거지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고들 하는데, 이 말에는 어딘가 수단과 방법,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하는 세태가 느껴집니다. 꼭 이긴 자만이 강한 걸까요? 강한 자가 스스로나 남들이 보기에나 다 이해할 수 있는 행보로 이겨가는 게, 그게 우리 모두가 궁구하는 그런 승부세계 아닌가요?

승부 앞에서 언제나 명국을 남기고 싶어한 사람이었어요. 이런 기도정신, 기사정신으로 고군분투한 사람이 김국수라고 생각해요. 조남철 선생이 다지고 마련한 마당에서 모름지기 승부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본을 보이고 정신을 일깨운 승부사였다고 봅니다. 또 사실 김국수 때부터 우리 일인자가 일본과 맞설만한 실력이 되었고요. 내가 고군분투라는 표현을 쓴 까닭을 아실 것입니다. 다들 그를 청산이니 태산이니 부르며 정신적 지주, 승부사의 표상으로 삼는 이유가 달리 다른 데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도전기 최종국에서 80수 만에 미련 없이 돌을 거둔 승부사

69년 7월 5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9기 최고위전 도전5국에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도전기 스코어 2대 2 상황에서 맞은 최종국이었기에 더 그랬다. 최고위 김인 七단이 79수를 놓은 시점에서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고 도전자 강철민 四단이 80수째 착점을 봉수(封手)하고 점심을 마쳤다. 오후 2시 다시 마주앉은 김인 七단은 도전자가 둔 봉수점이 중앙을 가르고 나가자 굳은 표정으로 요지부동인 채 30분 동안 반면을 응시하더니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돌을 거뒀다.

제9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최종국
백 도전자 강철민 四단
흑 최고위 김 인 七단
결과: 80수 끝, 백 불계승
1969년 7월 5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 덤 4집반, 제한시간 각 5시간>

국내 도전기 최단수수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88년 28기 최고위전 도전1국 조훈현-이창호 첫 사제도전기에서 80수가 나올 때까지도 깨지지 않았고 무려 28년이 지난 97년 12월 8일 15기 대왕전 도전1국에 와서야 깨졌다. 대왕 이창호가 조훈현 도전자에 75수 만에 흑 불계승한 도전기 최단수순 기록은 다시 2001년 7월 25일 35기 왕위전 도전3국에서 이창호 왕위가 스승에게 49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면서 한 번 더 경신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계패 선언에 입단동기였던 도전자가 더 놀란 나머지 “아니 이 사람 왜 이러나?”며 계속 둘 것을 권유하는 웃지 못 할 진풍경이 펼쳐졌을 정도였다.

▲ ‘입단동기’ 김인(왼쪽)·강철민이 맞대결을 벌인 9기 최고위전 도전기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대국은 도전자의 고향인 부산(한국기원 부산지원)에서 무전으로 착수를 전달받는 방법으로 오후 1시부터 김학수 四단이 공개해설에 나섰는데, 생전 처음 맞닥뜨린 도전기 최단명국에 운집한 관전객조차 “더 둘 수 있는 국면 아니냐?” “왜 더 두지 않느냐?” 질문공세를 펼쳤고 해설자는 쩔쩔매야 했다. 후일 김인 국수는 이 대국을 이렇게 담담한 어조로 자전해설하고 있다.

“백74로부터 백80의 수를 당해서는 흑의 패세가 결정적이라 생각했다. 흑이 초반 좌변에서 너무 무모한 급전을 서둘렀다는 게 잘못으로 결국 만회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됐다. 강철민 四단의 최고위 우승을 축하하며 건투를 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위원에게 들은 일화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박치문 위원 또한 김인 국수와 평생을 교유하고 지낸 바둑인사로서, 그가 대학생 시절 겪은 이야기다.
김포공항 가는 길목 염창동 인공폭포 인근에서 김국수가 누이동생과 자취하고 있던 때, 겨울 어느 하루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신세를 지게 됐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먼저 일어나 있던 김국수가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방으로 들고 들어오더란다. 이미 한 나라에 제일가는 국수다.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상대가 다섯 살 아래 아마추어 청년이건 누구건 자기집을 찾은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이러했다. 지극히 선비다운 품성,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인시대와 함께 스러진 한국바둑 낭만의 시대 ‘관철동’

관철동시대는 한국바둑계 낭만의 시대였다. 딱 김인시절까지다. 이후 조훈현-서봉수가 맹주가 되면서 온기 찾아볼 길 없는 냉엄한 승부세계로 돌변했다. 그래서 더더욱 김국수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로 자리하게 됐는지 모른다.

그 시절의 승자 김인은 결코 개선가를 부르지 않았다. 패자 아닌 동료들을 선술집에 불러모아 한바탕 사철가를 불렀다. 김국수가 타이틀을 결정짓겠다 싶은 날이면 한국기원 특별대국실 옆 기사실에는 어김없이 기사들이 가득차곤 했다. 그날은 허기진 승부사들이 밤새 달릴 수 있는 특별한 날이자 종로3가 관철동 골목 일대 음식점이며 술집들에 달려 있던 외상값이 일제히 변제되는 날이었다.

당시 한국기원 총무부에 근무하며 김국수와 때만 되면 등산을 함께했던 정희국 선생의 증언만 들어봐도 그렇다.

“몇 차에 걸쳐 이미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으로 마신 상태야. 그러면 종로 근방의 여관을 찾아서 김국수가 머릿수대로 방을 잡아주는 거야. 통행금지가 있을 때니까. 대부분 총각들이었으니까 재미볼 사람은 알아서들 보라고 각방을 잡아주는 거지. 하하. 그런데 아깝게 방값만 날리기 일쑤였어. 결국은 다들 김국수 방에 모여앉아 먼동이 틀 때까지 더 마시다가 널브러져 자곤 했으니까.”

그땟돈 몇 백만원이면 강남에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신문기전 우승상금이 몇 백만원 하던 때니 김국수가 저혼자 욕심 채우려 들었다면 아마 강남 빌딩주가 되어 여생을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대책 없다 할지 모른다. 본시 광에서 인심 나는 거니 어쩌니 가볍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시대를 가릴 것 없이 고대광실에 살아도 손바닥만한 인심조차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많다. 승자 독식한들 하등 이상할 거 없는 승부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절은 누구에게나 엄동설한의 시절이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김인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섰을 때라도 아래를 떠받쳐주는 다른 동료기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이를 수 없다는 걸 안 사람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승자는 한명이다. 그렇다고 수많은 패자가 한번 쓰고 버려지는 불쏘시개만은 아니다. 별이 빛날 수 있는 건 컴컴한 밤하늘이 뒤를 받쳐주기 때문인 것처럼 동료기사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최고의 일인자였다. 그런 빚진 마음을 가졌기에 동료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으로, 눈치 채지 못할 자연스런 방식으로 갚은 거라고, 그랬을 거라고 그 시절 김인과 술자리를 나눈 이들은 말한다. 정희국 선생이 단언한다.

“그와 살아있을 때 아무리 기를 쓰고 높이 올라가본들 기껏 하늘아래 산정상일 따름이었는데 죽어 그는 밤하늘에 언제나 빛나는 별이 되었잖아요. 타이틀을 땄다하여 어디 아무나 별이 되나요?”

▲ 82년 5월 지리산 반야봉에서. 왼쪽부터 백성호, 안영이, 김인, 조훈현, 권경언.

- 그러고 보니 [현현각]에서 낸 <명국세해(名局細解)>로 바둑을 공부한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지금과 같이 바둑 한판을 미주알고주알 해설해 주는 바둑TV나 인터넷 중계가 없던 시절 공전의 히트를 친 대단한 해설서였죠. 한수 한수 상세한 설명에다가 손아귀에 딱 잡히는 사이즈여서 휴대하고 다니며 볼 수 있는 장점도 컸고요.

“<명국세해>로는 재미 좀 봤지. 일본기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간한 <圍碁(위기)>라는 월간지가 있는데 그 본지에 딸려 나오는 부록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명품이었어요. 얄팍한 잡지는 순전히 이것 때문에 팔렸다고 보면 됩니다. 위기편집부원들이 보너스를 타면 한동안 한국으로 왔어. 나랑 만날 만났어.

▲ 추억의 포켓 사이즈, <명국세해>

그런데 <명국세해> 말이 나왔으니 이제야 하는 얘기입니다만, 일본 <圍碁> 잡지사에 참 미안했던 일이 하나 있긴 했어요. (일본기원 <棋道>지 편집장 출신으로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오시마 씨가 일본에서 2007년 1월 17일자로 사전에 안선생에게 보낸 약속날짜와 시간, 장소가 명기된 팩스 한장을 보여주며) 그때 우리나라의 모 九단이 명국세해에 자전해설을 하기로 약속해 놓고 전날 술을 오지게 마셨는지 하여간 감기 걸렸다고 안 나와버리는 바람에 아주 곤란했던 적이 있었지요. 1월 26일 오후에 모 호텔에서 만나 내가 통역해주기로 했기에 잘 알지요.

난감했지. 일본에서 와서 마냥 기다릴 순 없잖아요. 그냥 돌아갔어. 이거 <圍碁> 잡지에서 정식으로 손해배상을 물릴 수도 있는 일이에요. 그 달 독자와 약속한 부록을 펑크낸 셈인데 지금도 창피해. 국가적 망신 아냐? 국가를 대표할만한 실력과 명성을 누리는 기사들은 항시 책임감을 생각해야 해요.”

묻혀 있던 조남철 九단의 일본기원 初단 시절 기보 세 판 발굴

- 올해가 조남철 선생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젊은 시절 조선생님과도 자주 어울리셨나요?

“나하고는 10여년 차이가 나지만 형제인 조남석 씨(조치훈 九단의 부친) 하고 불광동 맥주집에 한동안 자주 가기도 했었지요. 어떤 날은 조선생의 인천 단골집까지 가기도 했고. 한국기원 관철동 옆 모서리에 삼화고속 주차장이 있었어. 거기서 나랑 달랑 타고 종종 갔어 인천 그 맥주집에. 당시 김정림 二단이라고, 뚱뚱하던 그 양반이 인천에 살아서 함께 어울렸죠. 술이야 김국수, 양건모 사범 같은 기사들이 많이 마시는 쪽이었고 조선생께서는 돈을 그리 쓰는 풍경은 없었어. 돈을 막 쓰는 스타일은 아니셨지.

그보다는 일본 국회도서관까지 가서 조선생의 묻혀 있던 신문기전 기보 세 판을 발굴해낸 게 큰 보람이었어요. 해방 전 일본에서 두었던 바둑인데 조선생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기보를 생각지도 않게 용케 찾아내게 됐어.

이 과정이 우연찮았는데, 어느날 사토 겐지라는 일본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홋다 마모루(堀田 護)라고 일본기원에서 근무하셨던 분이 있는데 이 분이 일본 <棋道>지 같은 잡지며 서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분 유족이 다 정리하겠다고 한다, 그런 정보를 흘려줘서 부랴부랴 날아갔지요.

요코하마에 가서 그 양반 영전에 부의금도 내고 그 자료들을 수습한 뒤 선별해서 가져왔어. 스물 몇 상자였는데 여기서 조선생 대국보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 거야. 그걸 바탕으로 다시 일본으로 날아가 국회도서관을 뒤진 끝에 1942년 신문에 게재된 조선생의 신진쟁패전(新進爭覇戰) 대국보 세 판을 발굴하게 된 거지. 신인기전 같은 대회로 보면 될 겁니다.

2000년인가에 조선생이 한지로 기보만 수록한 대국집을 낸 적이 있어. 그때 이 기보들을 당신 대국집에 넣게 되니까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생각지 않던 귀중한 기보가 발굴되어 선생님께선 아주 기쁘셨던 듯 거금 100만 원을 김수영 사범을 통해 나에게 전하시더라고. 그 돈이면 일본을 넉넉히 한번 왕래할 수 있는 액수지.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 했으나 봉투를 내 가방에 막 찔러 넣는 거야. 그렇게 조선생한테 촌지까지 받았는데 나는 부끄러워서 고맙다는 얘기도 못했어.”

신진쟁패전(新進爭覇戰) 제1국
백 조남철 初단
흑 오시로 쓰나코(大代津奈子) 初단
결과: 124수 끝, 백 불계승
<1942년 5월 26일, 일본, 덤 4집반>

조남철 九단은 1937년 일본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九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1941년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안영이 선생이 발굴해 <조남철 전집>에 실은 위 기보-1942년 오시로 쓰나코(大代津奈子) 初단과 둔 대국은 조九단이 귀국(1944년) 전 일본에서 둔 ‘최초의 공식대국’이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채보(採譜)해 남아 전하는 조선생의 ‘최초 대국보’이다. 전집에는 실렸으나 바둑잡지에는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 기타니도장 시절의 조남철 선생. 오른쪽 여자 대국자 뒤에 앉아 집중하여 대국을 보고 있는 청년이 원생 조남철이다.

- 제가 듣기로 한국기원 사무국을 들어서면 곧장 마주하는 조남철 선생의 흉상도 안선생께서 권하셔서 제작하게 된 거라면서요? 그러지 않으셨다면 조남철 선생의 흉상을 남길 생각을 아무도 못했을 겁니다.

“그걸 조소(彫塑)라고 합디다. 선생 생전에 조소 하나 남기십시다 권했더니 처음엔 안색이 싹 변해. 언짢고 화난 얼굴이야. 내가 곧 죽을 사람으로 보이냐…, 이런 분위기. 젊은 사람에게 하나 합시다, 하면 좋아할 수 있지만 옛날양반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설명을 했죠. 돌아가신 다음에는 사진을 참조해 조각을 파서 작업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닮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하니 하루라도 젊으셨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떠서 하나 남깁시다, 했지. 그때까지도 떨떠름해 하셨어.

근데 한 일주일 있다가 연락이 온 거야. 생각을 해보니까 역시나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거지. 합시다, 그러시더라고. 그때 조선생 얼굴을 하나 더 떠서 나도 별도로 보관하고 있어. 내 조소도 하는 김에 같이 떴고. 2000년 1월 22일인가, 형상을 뜨는 사진도 찍어놓았어. 동 재질로 하나당 50만 원인가 줬을 걸? 싸게 한 거야.”

▲ 안영이 선생의 권유로 조소 본을 뜨고 있는 조남철 선생. 안영이 선생은 이러한 장면도 사진으로 남겨둘 만큼 기록에 철두철미하다.

▲ 이렇게 뜬 조남철 선생의 흉상은 한국기원 3층 사무국 입구에 전시해 누구나 뵐 수 있도록 했다.

당대의 국수에게 “너는 아직 천 원짜리!”라고 대놓고 말한 시인

선생의 컬렉션을 보면 바둑관련 자료 외에도 일제강점기 그림엽서에서부터 하다못해 민병산, 서정주 선생의 친필이나 천상병, 박재삼 시인의 육필원고에 이르기까지 희귀한 것이 많다. 특히 관철동 한국기원에 노상 들락거리며 프로기사들과 친하게 어울린 천상병 시인에 얽힌 이야기는 배꼽을 잡게 한다.

술과 바둑을 좋아한 천상병 시인은 문단 최고의 기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바둑은 한 5급쯤 두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가 한때 국정9급을 행세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문디자식들아! 나는 국정9급이다! 너희 문단5급하고는 달라!”
“국정9급이 뭔데?”
“문디자식들! 국수(조남철)가 정해줬으니까 국정9급이지! 국정9급 맛좀 보겠나?”

“민병산 선생, 서정주 시인의 친필도 참 귀한 글씨 사료지요. 그 당시 천상병과 제일 친했거든. 후회되는 것이 글씨를 더 많이 확보해 보관하지 않은 거에요. 천상병 시인이 쓴 ‘백 원을 꿔줘서 미안하오. 꼭 갚겠소’ 같은 글귀는 일테면 부조해준 사람에 대한 명단, 영수증 격인 셈인데 이런 것도 보관하고 있어요. 장난이 좀 심하지만 얼마나 여유와 재미가 있습니까? 내가 사람 얼굴 그림을 몇 번 그린 적이 없는데 하루는 몇 번 딱 그리니까 천상 천상병이야. 그 양반, 그렇게 일찍 갈 줄은 몰랐어. 그 그림은 천상병 기념관을 한다 어쩐다 해서 부인 목여사한테 줬지.”

▲ “백원을 빌려서 미안하오. 꼭 갚겠소.” 천상병 시인의 위트 넘치는 친필 영수증.

91년 정월, 인사동에 자리한 카페 <歸天(귀천)>에서 천상병 시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歸天>은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찻집이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시인이 대뜸 오른손바닥을 내 눈앞에 내밀어 살짝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만 원 내놓으소!”

관철동에서는 이미 수십 년 된 유명한 천상병식 인사법이다. 결코 아무에게나 하는 행위가 아니란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한편 기분이 좋기도 했다. 원하는 액수를 손에 쥔 시인은 마치 고장 나 겉도는 축음기마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더니 아내에게 “나 만 원 벌었어. 내 통장에 입금시켜 줘. 대신 이 양반 찻값은 셈하지 말라고!” 어린아이처럼 소리쳤다.

한없이 천진난만한 그런 시인의 표정이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시인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불쑥 손바닥부터 내보이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애정표시다. 김인 국수뿐 아니라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만만한 봉(鳳)’으로는 조훈현 국수도 목록에 끼어 있었다.

시인은 특히 김인 국수를 무척 좋아했다. 김국수의 중후한 인품도 그러려니와 서로 ‘경지’가 통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한 봉’인 까닭도 없지 않아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500원이었지만 좋아하는 김인만은 국보(國寶)급 기사임을 우대(?)해 줄곧 천 원을 불렀다.

김인이 국수가 된 뒤 하루는 웃으면서 “선생님, 저도 이제 국수(國手)이니 2천 원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먼저 액수인상을 제의했다. 그랬더니 시인의 대답이 주변사람들 배꼽을 잡게 했다.

“김인아, 너는 아직 천 원짜리야!”

▲ 프로기사들과 친하게 어울렸던 천상병 시인.

강홍규 작가가 남긴 <관철동 시대>를 보면 ‘천상병의 손바닥 인사’에 대해 쓴 대목이 있다. 낄낄대며 재미있게 읽은 대목이어서 일부 옮기면-.

어느해 겨울 어느날 천상병이 바둑전문 출판사인 현현각을 찾아왔다가 등산복 차림의 ‘국수’ 김인을 만났다.

“아이구 김국수!”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처럼’ 천상병은 큼직한 포즈로 김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국수 천 원만.”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김인은 천 원짜리 한장을 내놓았다. 천상병에게 김인은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언제든지 요구 액수가(價) 즉시로 조건 없이 인출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좀 달랐다. 김인이 말꼬리를 단 것이다.

“그런데 천선생님, 제게도 거절할 기회를 한번쯤 주십시오.”
“아무때나 거절하이소. 거절하는 건 김국수의 자유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선생님은 미리 제게서 거절할 기회를 빼앗아가 버리니까 제겐 도리가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 이 천상병이가 남의 자유를 빼앗다니 그런 벼락 맞을 일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천선생님은 항시 여러 사람 앞에서 천 원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전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자유가 없는 겁니다. 천상병 선생에게 천 원을 드리지 않는다면 여러 사람 앞에서 김인이가 인색한 친구가 돼버릴 것이고, 또 김인에게서 천 원을 거절당했다면 천선생 체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와하하…”

천상병이 그토록 커다랗게 웃은 것은 자기의 속셈을 들켰기 때문이었으리라.

- 강홍규 저 <관철동 시대>에서.


22년 전, 이 대목을 기억에 담았다가 시인에게 물었다.

“요즘도 김인 국수는 천 원짜리입니까?”
“물가도 많이 오르고 했으니 앞으론 2천 원을 불러야지요.”

22년이 흐른 지금, 바둑과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인과 국수는 다들 소풍을 떠나고 없다. 시인묵객(詩人墨客)과 기사들로 북적거리던 관철동 골목도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바둑이야기도 사라졌다. 바둑기술자로 남는 걸 경계하고 바둑고수이기를 바랐던 승부사의 시대도 더는 볼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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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 |  2023-12-19 오전 1:07:00  [동감0]    
참으로 귀한 글을 읽었습니다. 뒤늦게 발견해서 만시지탄이 있습니다.
당대의 일인자 김인국수와 임해봉의 비공식 대국이 정선이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김인국수의 비감한 심정이 알알이 공감됩니다.
호선으로 1집반을 진 것이 옳지 정선으로 3집 이긴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사퇴서를 쓸만했습니다.
승패는 얼마든지 이기고 질 수 있습니다. 호선바둑으로 어쩌다 질 수도 있는 것을
당시 한국기원은 국격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김인국수의 반발은 당연한 의사표시였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바둑정신 |  2023-10-03 오후 10:15:00  [동감0]    
.김인은 소탈하며 대범하며 격식에서 자유로웠다.
대원경 |  2023-10-03 오후 5:38:00  [동감0]    
하하하~ 단적으로 지적합니다. 김인국수가 1968. 12. 세종호텔의 린하이펑 9단과의 정선대국을 앞두고 하옇게 밤을 새워
쓴 사퇴서 어느부분에 <목숨을 걸고 승부사의 자존심을 건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여러개의 국내 타이틀 홀더로서
국내 국수로서 명예실추와 관련된 부분은 들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승부사의 자존심을 건다>는 결기어린 내용은 하나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필자는 이런 사퇴서가 55년의 시간을 견뎌 문화재가 되었다고 평하고 있는데, 나그네가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객기가 드러
난 종이쪽지에 불과합니다. 왜 그런지를 간략히 입증합니다.

당시 김인 국수는 두차례 대국했는데, 비공식대국인 정선대국에서 3집 반을 이겼고, 공식대국인 호선대국에서 6집 반을 졌
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사퇴서를 쓴 것은 비공식대국으로 치른 정선대국대국이니, 공식대국인 호선대국은 평소의 실력
이 입증된 것입니다. 좋다 이겁니다. 그러면 문제의 김인국수가 사표서와 직접 승부사의 자존심을 내세워 싸운 비공식대
국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 당시 김인국수는 중간에서 안영이선생이 사퇴서를 빼앗으며 결사반대하여 저지를 당하였
습니다. 그 결과 굴욕을 참고 받아들이기로 의사를 번복합니다. 그래서 대국을 합니다. 그결과 3집반을 이겼습니다. - 그러
나, 당시 덤이 4집 반이었습니다. 따라서 호선대국으로 했다면 1집 반으로 패한 대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실제 비공식대국,
공식대국 2판다 김인국수가 진 대국이었습니다. - 고로, 필자가 실제 진대국을 가지고, 단지 국내기전을 몇개 가지고 있어
명에에 실추될 우려가 있다는 생각으로 사퇴서를 제출하여 하였지만, 실제 김인 국수의 실력은 임해붕을 이길수 없는 대국
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표서가 제출되었더라면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할 뻔한 사건이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퇴서를 썼다하여 어짜피 대국에서도 두판다 져버렸으니, 그 사퇴서는 차라리 제출되지 않았던 것이 옳았던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사퇴서가 한국기원에 제출되지 않된 것이 참으로 잘된 일인 것입니다. 왜? - 사퇴서를 제출하고도 대국
에서 졌다면 그게 승부사입니까? 그러니, 얼마나 쪽팔리고 창피한 일입니까? - 그러니 사표서가 제출 안 된 것이 천만다행
이라는 것입니다.- 거러니 그 사퇴서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그런데 이런 사표서를 가지고, 55년후 바둑팬들에게 그 자필 사퇴서는 <목숨을 건 승부사의 자존심을 지켰다>, <55년의
시간을 지내면 문화재가 된다>, <프로스트시인의 가지않는 길을 간 것이다> 등등 사표서에는 하나도 없는 내용을 지어내어
포장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창피한 일로 드러난 사퇴서를 빌미로, 이것이 김인의 목숨을 건 승부사적 자존심을 지킨
것이라고 둔갑시켜 후배기사에게 위대한 정신이니, 귀감이 되니 따르라고 매년매년 기념하고 선전할수 있는 것입니까? 참
으로 바둑사의 수치이고, 창피할 일입니다. - 한번 시원하게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빠글빠글 당시 교통 사정이 1박 2일을 요하는 시절에 김인 국수는 국수가 되자 고향의 전남 강진의 30세 초반 안영이(7세 연상)씨를 한양에 불러 바둑계에 입문시켰으며 이때부터 사실상 비서실장 역을 담당하게 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정용진은 한국기원 역대 최장수 이사 겸 사이버 오로의 김인 이사에게 한국기원 입사부터 철저한 포복으로 오늘에 이른 입지적인 사람으로 평가됨. 즉 과거 다른 스포츠계에서 많은 지탄을 받아온 친위 인맥으로 형성된 관계로서 현대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대국수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한국 바둑계의 숨어있는 고질적인 병폐의 하나라 하겠음.  
빠글빠글 결론은 한국바둑계의 <스펙트럼> 한계라 하겠으며, 다시 말해 다양성과 함께 어떤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바둑인들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라 사료됩니다.  
대원경 깡패, 건달의 세계에 <후까시>라는 일본어가 흔히 사용됩니다. - 바둑팬들이 잘 알다시피, 어원을 찾아들어가 면 일본어로 '과시하다', '허풍을 떨다', '나발을 불어 대다'라는 뜻의 동사 吹かす(후카스)의 명사형 吹かし(후 카시)입니다. 일제강점기 거리에서 피해를 당한 약자인 우리동포들에게는 뼈아픈 단어일수도 있습니다. 해방후 자유당 시절 주변사람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뻥티기 하고, 뺨맞고 어르기 당하고. 씹주고 매맞는 등등 수탈을 당 하고도, 여보란듯이 어깨에 후까이 넣고 거리를 누비던 시절입니다. 당시는 일제해방후 일제앞잡이 노릇을 했던 - 정치 깡패들이 판치던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승만이 선거운동원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5.16혁명이 일 어나자 박정희 정부는 국가재건을 한다면서 일제히 소탕을 해버렸습니다. 전두환정부는 이를 흉내내어 청송 삼 천교육대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후에도 우리사회에는 사회곳곳에는 그 근성이 사라질 이유가 없습 니다. 김인국수도 젊은 날 성장과정에서 이런 <이런 후까시 일제 문화>속에서 성장한 분입니다, 안영이님또한 마찬가기고요. 그러니 이런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 대표적으로 청산됭어야 할 일제문화라고 생각 합니다.  
대원경 천상병시인이 김인국수에게 던진 말 - < “김인아, 너는 아직 천 원짜리야!”>라는 소리가 귓 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 합니다. 또 <백원을 빌려가서 미안하오. 꼭 갚겠소 _ 천상병->이 라쓴 영수증이 아주 아이러니컬 합니다. 고작, 100원짜리밖에 안된다는 소리기도 하기 때 문입니다. ㅉㅉㅉㅉ 이런 물건들을 마치 55년을 버텨온 문화재로 둔갑시켜 제발 경매장에 는 출품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선량한 미풍양속을 해치기 때문이외다. _((()_ ㅎㅎㅎ~~~  
빠글빠글 <김인아 넌 아직 천 원짜리야> 이 말은 나는 즉흥시의 한 구절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상대가 자신만의 법칙을 돈의 가치로 대하는 데에 대한 묘멸감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이에 대한 답변을 깊은 뜻이 담겨진 시 한 구절로 일갈하였다고 봅니다. 내가 접한 경험으로 시 인은 긴 말을 하지 않고 경상도 악센트가 강한 어조로 딱딱 귾어서 몇 마다만 존어로 건내 는 시인으로 기억하기 때문이죠. 참고로 시인은 서울상대 출신이며 이하는 생략합니다.  
소석대산 |  2023-10-03 오전 11:04:00  [동감0]    
하.. 자주 대하기 어려운 이런 귀중한 특집 기사에도 게재 타이밍과 그 방식 등을 두고 불만섞인 의견이 자꾸 개진되는군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우선, 아시안 게임이 자주 거론되는데,
거기에 바둑 종목이 있는 까닭에 한국 참가기사들이 어떤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바둑 내용과 참가기사들의 근황은 어떤지에 대해 많이 궁금하신 분들이 계신가 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그런 쪽은 전혀 관심이 없는 까닭에
이런 특집 기사에 대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댓글을 달고 싶지 않았으나
이럴 때 침묵하면 불만 의견이 도드라지는 것 같아 몇 줄 의견 남기네요.
정 편집장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technozks 소석대산님은 왜 <메인뉴스>에 칼럼이 올라와야만 대만족하고 읽으시나요? 오로 메뉴 중 < 칼럼폴더>에 가면, 훌륭하고, 수준높은 칼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서 대만족하며 하 루종일 읽으세요!!!!!  
소석대산 칼럼에 게재돼야 할 기사가 왜 뉴스란에 올라와 있고 아시안 게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왜 이런 특집기사를 올려 아시안 게임에 대한 주목도를 떨어뜨리느냐가 님의 주요 불만사항이셨던 듯 한데 님이 생각하신 바를 이해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 특집기사를 읽으며 아련한 옛 추억을 더듬어보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제게 칼럼란이니, 뉴스란이니, 게재 타이밍이니, 주목도니 이딴 것이 무슨 대수였겠습니까? 그런 심사를 댓글로 올려 님을 불쾌하게 해드린 것 같군요. 사과드릴께요.  
technozks 사과까지 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님께서도 님의 감정과 의견을 올렸듯이, 저도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 니다. 과격했다면 제가 사과드립니다.  
technozks |  2023-10-03 오전 8:12:00  [동감0]    
정용진 이사라는 분의
”바둑 역사 돌아보기“는 비록 월간바둑지의 내용과 중복되는 점도 있지만, 필요한 자료이며,
오히려 연구비를 주어서라도 적극 권장할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급성과 시의성이 중요한 <메인뉴스>보다는 오로메뉴 중 <칼럼>폴더가 있으니 거기에 올리라는 것이다.
위의 칼럼은 시간을 타투는 긴급보도가 아니므로, 칼럼폴더에 올려 놓으면, 관심있는 분들이 시간이 날때
보실 수 있게 말이다.

지금 시점에서 바둑팬들은 아시안게임 바둑전사들의 열전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굳이 올려야 겠다고, 마음먹고, 작정했다면, 아시안게임 기간은 최소한 피했어야 했다.
차라리 <시의성> 있게 아시안게임 바둑이슈에 대한 칼럼을 올렸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어떤이는 메인뉴스에 올렸다가 연재가 끝나면 칼럼폴더로 옮기면 되지 않냐고 한다.
그렇게 할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수 많은 칼럼리스트들(문용직, 이청, 여다운, 손종수, 정용진, 양형모, 이주배, 바둑노래, 현현기경해설, 유럽기행 등)의
컬럼을 메인뉴스에 다 올리다 보면 메인뉴스의 고유기능(시급성, 시의성) 역활이 떨어질 수 있으며,
독자들도 혼란스럽고 짜증이 날 것이다.
그렇다고 정용진 칼럼은 이사라는 빵빵한 직책을 가지고 있으니 올리고, 어떤분 칼럼은 삥바리라고 안올리고..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때문에 오로에서도 메뉴창에 <칼럼폴더>를 별도로 구분해 놓았을 것이다.

칼럼폴더에 가면 훌륭하고 수준높은 칼럼들이 많이 있다.
시간 나실때 가서 보시길....
서민생활 저도 이분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너무 같은 말씀을 계속 올리는 것은 서로가 불편합니다. --- 너무 그라지 마 셈. 저도 70대 중반이라 이런글 땜에 잠시 좋았던 시절로 시간여행을 간답니다. 요즘 젊은이들 애를 안낳아서 또 바둑도 별로안둬서 아마 여기 독자 반 정도는 50대 이상일것 같소. 젊은이들에겐 이런 글이 눈에 거슬려도 꼰대라고 핍박하지 마시고.. 남녀노소가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소?  
technozks 불편하게 생각하셨다면, 어르신께는 죄송합니다.  
서민생활 |  2023-10-02 오후 7:40:00  [동감0]    
1960년대에 김인국수시대 였었습니다
그 시대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었다고 통계로 말하고 있지만.
그때 살았던 기억으로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생활을 했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뭐든 부족하고 버스는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에 같았고,
그리고 동숭동 대학가에서 광화문까지 걸어서 가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게 생각되던 시기였었습니다.
그렇게 걸어 다녀도 걸어가야 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던 그 시대에는 지금은 없는 낭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50년전의 이야기를 , 아득한 옛날 기억속에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즐거운 과거를 회상하는 글을 써 주신데에 감사드립니다.
50년전 시대에 살지 않았던 분들에게는 생소한 그 시대의 모습이겠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분들은 이 연제 글을 보면서 잠시나마 젊은 시절을 회상하게 되어 즐거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의편지 |  2023-10-02 오후 6:57:00  [동감0]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빠글빠글 |  2023-10-02 오후 5:31:00  [동감0]    
천상병 시인과의 대화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도 이제 국수이니 2천 원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일언지하에
<김인아 너는 아직 천 원짜리야>
그런데 그 뜻을 해아리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표현하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문학계의 전무후무한 기인으로
그의 행보는 너무나 유명하며 나도 천 원짜리였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그만이 갖는
철칙이 있다 .그것은 첫째, 모르는 사람에겐 절대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 500원과 1000원으로 등급이 있다는 것이며 그 이상은 절대로 안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만이 갖는 법칙의 한 일면이자 그의 철학적 가치가 내포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3층 일반회원실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왔다갔다 히다 지인을 만나면 00님 하고 부른다.
그의 목소리는 늘 우렁차다. 절대로 자신이 비굴하지 않다는 면을 당당히 표현하며
20년 연하인 나에게도 늘 <님>자를 붙이며 말을 건네는 첫눈에 봐도 기인의 풍기를 느끼는
시인이엇던 것이다.
그런데 <넌 아직 천 원짜리야> 이 깊은 의미를 파악 못하는 바둑인이 있다는 것이다. (생략)
빠글빠글 |  2023-10-02 오후 4:32:00  [동감0]    
정용진의 특별기획 하의 안영이의 구술은 지극히 검증이 안된
특정인의 자의적 <용비어천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자 전남 강진읍에 정착하였다는데
당시의 사정상 강진은 인구 2만의 농촌 마을에서 그의 10, 20대 이력(학력,경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병역문제는 매우 엄격했던 시절)
그 후 30세 초반에 김인 국수의 어린 시절의 인연으로 상경하여
비로소 바둑계에 입문하게 되었던 안영이 씨를 정용진은 한국 바둑계의 서지학자이자
<유일무이한 산증인>이라 칭송하는 글로 연일 재탕 도배를 하는구나.
하기야 바둑계의 진짜배기 산증인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누가 실체를 반박하리...
이것을 두고 우리는 <호가호위>의 위세를 떨친다고 한다.

바둑계의 발자취와 역사는 특정인의 친위적 일방 구술은 자칫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하여 소위 <가스라이팅>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일명 3류 찌라시 기자일 뿐인 것이다.
팽나무 |  2023-10-02 오후 3:03:00  [동감1]    
가슴이 따뜻해지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
econ |  2023-10-02 오후 2:44:00  [동감2]    
지금 아시안 게임의 venue 항저우는 소동파의 고향입니다. 본명이 소식 인 소동파는 당송팔대가의 하나로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바둑 명언을 남겼지요.-바둑은 이기면 이겨서 좋고 져도 즐겁다!- 이는 바둑인이 도달할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 위의 본문
에도 등장하는 바둑기술자들에게서는 볼수 없는 품격높은 道
bibili 틀린 정보를 하나 바로잡겠습니다. 소동파는 항주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천성의 미산眉山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20세에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사천성 성 정부 소재지인 청뚜에서 남으로 민강岷江을 따라 약 100킬로 내려오면 미산시이고, 다시 민강岷江을 따라 남으로 약 100킬로 내려오면 관광지로 유명한 낙산[러산] 대불이 있어요. 항주에서 짧은 시간 두 차례 벼슬을 하긴 했지만, 고향이 항주라는 건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죠. 항주에 있을 때, 서호에 둑을 쌓았는데, 소동파의 둑이라 해서 소제蘇提라 합니다. 지금 대전광역시에는 소제동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서 따온 명칭이죠. 소동파는 중국의 역사인물 중 아주 유명한 인물이어서, 소동파가 사천성 미산 사람이라는 건 아마 웬만한 중국인은 다 알 겁니다. 소제蘇提나 동파육東坡肉 같은 요리 때문에 항주와의 관련성에 대한 임팩트가 좀 크긴 하지요.  
technozks bibili님! 대단하신 고수분이시네요!  
7830fafo 에콩이의 본령이 제대로 까발려지는 장면이 깨소금이다.ㅎㅎ  
technozks |  2023-10-02 오전 10:43:00  [동감0]    
정용진 이사라는 분은
아시안게임 바둑 준결승이 열리는 오늘, 전장에서 이탈한 떡수는 그만 두시고,
이 시점에서 <시의성>이 없는 위의 연재컬럼은 시간을 타투는 긴급보도가 아니므로,
메인뉴스에 올릴 것이 아니라, 관심있는 분들이 시간이 날때 볼수 있도록, ”칼람폴더“로 옮겨야 한다고
그렇게 누차 의견을 올렸는데도 개무시 하고, 들어 쳐먹지를 않네......

바둑팬들의 관심이 온통 아시안게임에 집중되어 있는 이 때에
그래도 명색이 바둑인으로 영향력이 있다는 인사가 <시급성, 시의성>에서 벗어난
흘러간 옛노래나 계속 들추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시안게임 바둑경기에 어깃장을 놓자는 것인지? 아니면, 고춧가루를 뿌리자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꼬장 부리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불가한 꼴통이다.
나이들면 앞뒤 분간 못하고, 다 이렇게 꼰대가 되는 것인가?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듣겠다“ 뭐 이런 것이냐?
나는 계속 떠들겠다!!!
clint 너무 그라지 마셈. 저도 70대 중반이라 이런글 땜에 잠시 좋았던 시절로 시간여행을 간답니다. 요즘 젊은이들 애를 안낳아서 또 바둑도 별로안둬서 아마 여기 독자 반 정도는 50대 이상일것 같소. 젊은이들에겐 이런 글이 눈에 거슬려도 꼰대라고 핍박하지 마시고.. 남녀노소가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소?  
technozks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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