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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뷰티풀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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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뷰티풀 월드
2004-03-29 조회 10659    프린트스크랩
영화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를 보다가, 논리적인 것이라면 작은 승부라도 지고는 못사는 주인공을 묘사하기 위해 등장시킨 대국장면에 놀란다.

비록, 바둑판 위에 연출된 모양은, 바둑을 웬만큼 두는 사람이라면 곧 알 수 있을 만큼 치졸한 18급 수준의 형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이었다(일본에서는 이 영향으로 완구점의 바둑판세트가 불티나게 팔렸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1994년 '게임이론-내쉬균형(Nash Equilibrium)'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 존내쉬의 인생을 '역경을 넘어선 인간승리'로 완성시킨 이 영화는 재미있다.

영화는 24세부터 5년간 적어도 3명의 남성과 '특별한 우정'의 동성애 관계를 가졌고, 4년간 내연의 관계를 맺은 5년 연상의 평범한 간호사를 사생아와 함께 버렸다는 '사실적 흠'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고 MIT에서 만난 아내 앨리사와의 로맨스 역시 상당 부분 미화한 것이지만, 약 50년의 인생을 2시간으로 압축시킨 영화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서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해 암호해독가로 활동하다가 끝없는 정신분열증으로 추락하는 천재, 환각의 늪에 빠진 주인공을 끝까지 보살피는 헌신적인 아내등의 구성이 지나치게 상투적이지만, 형이상학적 수학이론과 당대 미국사회의 고급유머를 적절히 모자이크한 감독 론 하워드의 연출, 존 내쉬역의 러셀 크로와 그의 아내 앨리사역의 제니퍼 코넬리의 연기는 그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매력적이다.

이 영화를 보다가 '천재의 광기'에 대해서 골몰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영화의 얼개가 관객을 그렇게 유도하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과 정치×시×예술에서 예의적 인물(천재)들은 눈에 띄게 우울하다'고 밝힌 이후 '천재의 비밀'을 캐기 위한 노력은 현대까지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필립 브르노는 '한 시대를 앞서가며 인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천재는 그로 인해 기존의 세계로부터 단절되지 않을 수 없고, 그 단절이 광기를 부른다'고 말한다.
그는 잔다르크×루터×랭보가 일으킨 환각의 발작, 괴테×발자크×슈만이 겪은 조울증, 고갱×반 고흐×헤밍웨이가 보여준 자살 경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적 광기를 열거한다.

그럼, 바둑의 천재들은 어떤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현대바둑의 틀은 17세기의 기성 도사쿠(道策×1645∼1702)의 구조주의로부터 비롯되었고 20세기의 기성 우칭위엔(吳淸源) 선생이 주창한 속도와 균형의 개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금을 통틀어 바둑계를 빛낸 천재들을 열거하자면 그 수가 한둘이 아니겠으나 이 두 사람만큼 현대바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다.

'천재들의 임계질량이 문명의 전분야에 '진동과 지진'을 일으킨다.(임계질량이란 핵분열 연쇄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인 최소질량)'(윌리엄 제임스)'

천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와 똑같지만 4분 이내에 1마일(1,609.30m)을 달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양적으로 우리를 압도하는 천재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G단조 푸가'를 만든 바흐와 같이 분명, 남다른 인간적 섬광을 지닌 천재다. 우리는 앞의 천재보다는 늦지만 똑같이 1마일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G단조 푸가'와 같은 곡은 시간을 더 들인다해서 누구나 창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폴 핼모스)'

그렇다. 윌리암 제임스나 폴 핼모스의 말에 의하면, 도사쿠나 우칭위엔이야말로 '바둑이라는 세계의 전분야에 진동과 지진을 일으킨, 분명, 남다른 인간적 섬광을 지닌' 천재일 것이다.
자, 그럼 '한 시대를 앞서가며 인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천재는 그로 인해 기존의 세계로부터 단절되지 않을 수 없고, 그 단절이 광기를 부른다'는 필립 브르노 말처럼 도사쿠나 우칭위엔의 내면에도 광기가 서려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도사쿠나 우칭위엔 또는 바둑이라는 세계에 진동과 지진을 일으킬, 또 다른 바둑천재들은 행복하다. 왜? 그들은 이미 현실과 완벽하게 단절된 세계 안에서 내면의 광기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은 구상(具象)으로 압축된 추상(抽象)의 세계이며 그들이 벌이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안전한 바둑판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정신의 폭주다. 어떠한 경우에도 현실과 뒤엉키는 혼돈이나 망상은 없다.

한판의 바둑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면 아수라처럼 전장(戰場)을 누비던 조훈현은 평범한 가장이요, 절대인내의 승부사 이창호는 그저 말수 적고 사려 깊은 청년일 뿐이다.

바둑은 끝없는 사유(思惟)의 지평이요, 인생의 은유다. 인생의 거의 모든 면을 보여주지만 그 자체는 허구이므로 실제의 생존을 위한 재화로서의 가치는 전무하다. 그 재화로서의 무용함이야말로 바둑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며 대국자가 반상에서 보이는 정신의 폭주를 종횡 19로, 0.192 평방미터 안에 가둬두는 오묘한 장치다.

바둑은, 모든 예술행위의 근본이 그렇듯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으로 해서 그안의 모든 행위를 현실과 단절시킨다. 아니, 그 누구도 바둑판 위에서 횡행하던 정신의 폭주를 현실로 이끌어올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바둑이 가진 재화로서의 무용함이, 생존을 위한 재화획득의 억압과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회전(大會戰) 끝나면 사람들은 바둑돌을 거두어들이고 바둑판은 다시 태초의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어떤가. 이쯤 되면 바둑을 즐기는 정신이야말로 '뷰티풀 마인드'요, 바둑이라는 세계야말로 '뷰티풀 월드'라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2002-03-25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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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心不亂 |  2004-03-29 오후 8:5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움... 바둑의 새로운 느낌...  
sleepdog |  2004-06-19 오후 5:1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넘 수사적이군요. 담백한 글이 난 좋더라...  
멕짱 |  2004-07-28 오전 12:3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지금까지 수많은 바둑에 대하 정의를 들어봤지만, 이처럼 간명하고 논리적으로 정의한 글은 못봤습니다.  
멕짱 |  2004-07-28 오전 12:35: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끝없는 사유의 지평, 인생의 은유.. 특히 재화로서의 무용함이 결국 바둑의 진정한 가치임을..  
박경화 |  2004-08-03 오후 11:08: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만약 그 한 판으로 바둑의 전부가 끝난다면 인정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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