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癖)’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일에 지나치게 빠져 병이 되는 것을 뜻한다.

실제적인 경험이 없으면서도 오로지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식으로 주야장창 책만 읽는 것을 ‘서벽(書癖)’, 학문은 멀리하고 오로지 술과 기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주벽(酒癖)’, 손버릇이 나빠 남의 물건을 자꾸 훔치는 것을 ‘도벽(盜癖)’, 집안일을 멀리하고 하루종일 바둑이나 장기두는 것을 ‘기벽(棋癖)’이라 한다.

한양에 사는 두 젊은이가 있었는데 워낙 내기 바둑을 좋아하여 날만 새면 둘은 무엇을 걸어놓고 바둑을 두었었다. 그러는 그들에게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기생들이었다.
하는 일 없이 바쁜 사내들을 위해 두 여인은 이따금 시간을 쪼개 들로 산으로 나가 가무(歌舞)를 즐기며 장차 두 사내의 일취월장을 기원하며 위로하기에 여념 없었다.

일곱 해 전의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좋은 봄날의 싱그러운 바람과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끝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일 배 일 배 부일배.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술 기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들의 행동은 거칠어졌고, 급기야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두 사내는 가까운 동굴을 찾아내 그곳에서 무언가를 모의하다 일본 땅으로 도주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가 남아있는 산자락을 서로의 가슴에 숨긴 채 지금껏 지내온 것이다. 번화가의 뒷골목에서 사기 바둑을 두고 지내오다 우연히 ‘본인방가’의 사람을 만나 한 가지 청을 듣게 되었다.

“자네들이 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들었네. 내가 모시던 분이 세상에 남아있는 바둑에 관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수집하는데 소문엔 조선의 운종가에 자리잡은 ‘오로관’의 육청하라는 관주에게 ‘원나라의 마노 바둑알’이 있다는 소문이네. 자네들이 우리 바둑 도장에서 일 년여를 수련하여 조선에 건너가면 그것을 가져올 수 있네.”

두 사내가 열심히 수련을 한 탓에 실력도 일취월장하였다. 조선으로 출발하기 달포 전엔 임시로 바둑 대회를 열어 아마추어로서는 영예에 해당하는 ‘명인’과 ‘국수’ 칭호도 내려줬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를 나타내기 위해 정상인석의 발양론에 나오는 활지부(活之部) 문제를 보내 기선을 제압하고 정해진 날 ‘오로관’ 들어섰다. 가려 뽑은 몇 사람이 그들과 대국을 했으나 형편없이 나동그라지자 일본에서 온 두 사내 중의 하나가 거만을 떨었다. 그가 육청하에게 말했다.

“이곳 ‘오로관’의 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주가 갖고 있는 ‘원나라의 마노 바둑알’을 우리에게 넘겨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관주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물건을 우리에게 청하십시오. 우리가 내기에 지면 반드시 내놓겠습니다.”

그러나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 망설이고 있는데 뜻밖에 경위원에 몸 담은 장율하 순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엣말로 뭔가를 속삭이자 육청하는 그제야 내기바둑을 허락했다.

상대방은 이 집에 들려 꿈 얘기를 했던 젊은이로 그가 일본에서 온 사내들에게 말했다.

“내기를 하는 조건에 대해 들었습니다만, 한 가지 더 양해를 구할 게 있습니다. 나는 평소에 다면기(多面棋)를 자주 두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명성을 날린 두 분과 그런 바둑을 두고 싶습니다.”

“우리와 다면기를 둔단 말입니까?”

그들이 어이없어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실력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비웃음을 깨물었다. 두 사내는 눈짓을 교환하고 나서 한 사내가 푸접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두길 원하신다면 그리 하십시오. 우리 두 사람을 상대로 다면기를 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는 것은 공평치 않은 것 같으니 젊은이가 우리 두 사람 중 한사람만 이겨도 승리하는 것으로 하겠소.”

일단 양해를 구하자 바둑은 곧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바둑은 다섯 수가 지나기 전에 승부가 나버렸다. 조선의 젊은이는 일본에서 온 사내들의 바둑을 흉내바둑으로 대처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두 사람 중 한사람은 지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크게 후회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젊은이는 품속에서 간밤에 꾼 꿈속의 일을 끄집어냈다.

“내가 지난밤 꿈을 꾸었는데 악기를 든 두 여인이 나타나 내게 오늘 바둑을 두어 이긴다면 ‘배년붕반원무심(配年朋半怨無心)’이란 말을 들려 주라지 뭡니까. 두 분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습니까?”

이 말은 기유년(己酉年) 2월 15일(朋半)에 죽었다(怨無心)는 것을 나타냈다. 이날 그들과 정을 나누던 기생 두 사람이 살해되어 암매장 당한 것이다.

자신들의 한을 풀고자 경위원 장율하 순검의 꿈에 나타났고, 일본 바둑계의 바둑 고수 마음자리에 파고들어 조선으로 그들을 가게 한 것은 결코 세상이 허망한 것이 아님을 설명해주는 부분이었다.  <제18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