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괴이한 묘수풀이

‘오로관’의 동쪽 숙소에 머무는 육도(六韜) 선생은 쉰이 넘어보이는 나이였지만 인격은 반 뼘이 넘는 수염처럼 다른 사람 눈엔 확연히 들어온 상태였고, 머리 한쪽에 웅크린 동서고금의 해박한 사연은 병략을 ‘설(說)’하는 그의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놀라움의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 십상이었다.

바둑은 두는 법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천해 왔다는 것으로, 어느 날은 양나라 무제(武帝)가 찬(撰)한 [수서(隋書)]의 <경적지(經籍志)>에 기법 한 권이 있다고 운을 떼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아는 건 어려운 일이고 후한(後漢) 시대 문인 반고(班固)의 [혁지(奕旨)]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가끔 허세(虛勢)를 설치하고 미리 배치하여 스스로 호위를 하니 이것은 포희(包犧)씨의 그물 치는 제도와 같음이요, 제방을 두루 일으켜 세우고 무너짐을 막는 것은 하후(夏后) 씨의 홍수 다스림의 형세를 말함이며, 구멍이 하나 부족하여 무너지고 일어서질 못하고, 조롱박에 물이 넘치는 실패가 있고 복병을 만들어 거짓 설치하고, 포위망을 충동하고 횡행하는 것은 전단(田單)의 기계가 분명하다.

요해지(要害地)에서 서로 겁략하고 땅을 분할하게 하여 상(賞)을 취하는 것은 소진과 장의의 자질이요, 분수를 알아 승리를 거두되 용서하고 베이지 않는 것은 주문왕(周文王)의 덕이요, 망설이는 선비걸음이 귀를 보전하고 옆을 보완하며 연속해 패하더라도 망하지 않는 것은 요공의 지혜이다.>

그의 말을 살피면 바둑판 위에서 돌의 방위나 설치, 그리고 보완이나 돌진 등이 잘 나타나 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길 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바둑을 사랑했던 문인들의 시를 한 수 올려놓기 마련이었다. 어제는 중국 진조(晉朝) 때의 문인 배설(裵說)의 바둑 시였다.

열아홉 평평한 길이(十九條平路)

두다보니 험하기만 하네((乍平又險峨)

사람의 마음 속 내 어찌 아리(人心無算處)

국수도 가끔 질 때가 있는 것을(國手有輪時)

얘기가 여기까지 흐르면 당연히 후한시대의 기성(棋聖) 마융(馬融)의 [위기부(圍棋賦)]가 나올 법도 싶은데 좌중의 기대를 뒤엎고 점잖치 못한 기녀(妓女) 얘기로 옮겨가 버린다.

어디에서 무슨 얘기를 듣고 어떤 서책을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지껄일만한 얘기가 아닌 탓에 좌중은 물을 끼얹듯 조용히 가라앉는다. 간지러운 얘기가 꼭지를 튼 것은 이때쯤이었다.

“이 세상엔 병략만 중요한 게 아니라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거든. 맑은 공기를 마시면 내장까지 후련해지고, 먼지 낀 길을 걷다보면 모든 것이 한순간 오염되어 아무리 씻어내도 깨끗해질 수 있는 희망이 안 보이거든.
특히 사내들 마음자리는 우화(寓話)라고 할 만큼 더러움의 아집으로 가득 찼으니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그것이 아닌가 싶네. 마음자리가 지저분하고 더러운 사내일수록 제 아내는 순결하고 깨끗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게야.”

누군가 한쪽에서 내심 구시렁댔다. 그거야 당연지사라는 것이다. 어떤 놈이 너덜너덜한 헌 계집을 여편네로 삼아 한평생 옆에 꿰차고 지낼 것인가. 사내가 적당히 술 마시고 혈기가 동해 바람을 피우는 것이 큰 남자고 풍류남아지 어떻게 한 계집만 바라보고 평생을 사는 쪼잔한 짓에 명함을 내밀 것인가. 

그 말을 육도 선생이 못 들어서인지 쏟아지는 건 기녀(妓女)에 관한 얘기였다.

“삼한(三韓)이라 부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은 오래 전부터 기생들이 궁중을 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야. 가무음률에 뛰어난 여인이다 보니 제왕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고, 그로인해 나라가 위태롭게 흔들려도 대수롭지 않다고 여유를 부리잖은가. 그것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이지.”

금방이라도 콧노래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선생은 손에 든 쥘부채로 한쪽 손바닥을 내려치며 헛기침을 두어 번 뿌리더니 슬그머니 뒷얘기로 넘어갔다.

“내가 오늘 하려는 건 기생 얘기야. 예전에는 기녀들이 어지간한 물건 값을 능가해 돈냥이나 있는 것들이 사고파는 물건으로 전락했거든. 가무음률이 뛰어나고 교태로운 미소를 해질녘 물안개처럼 흘리는 계집이라면 힘없는 사내들이 안아보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오로지 그 물건들은 힘 있고 재물이 푸짐한 사내들 몫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긴 그런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