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반장(金盤葬).

계봉산 아래는 백제 열기현의 치소였던 백곡리가 있다. 그 백곡리의 마을 입구에는 계봉산에서 남동으로 묵직하게 흘러 내려오다 맥이 뭉친 곳이 한 곳 있는데 마치 수반의 모양을 하고 있어 금반장의 명당이라 전해 온다.

명나라 풍수객 두사충이 답사를 통해 기록해 놓은 이 명당지는 명산론의 수록 내용과 관계 없이 주민들에 의해 명당지로 기려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이곳은 참으로 절묘하다. 잘 만들어진 수반의 모습 그대로로 두사충이나 여타 조선의 풍수객들의 눈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두사충이나 여타 풍수객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금반장 자체가 자연적인 산석이 아니라 인공적인 조형이라는 점이다. 이곳은 계봉산에서 내려온 지맥이 아니라 백제시대 쌓은 토성이다. 열기현의 동쪽을 방어 하던 토성이 오랜 시간을 지나며 산의 지맥으로 인식되며 망루에 해당하던 자리가 금반장의 명당지로 인식된 것이다.

사실 금반장을 포함한 지맥이 백제 토성으로 지표 조사되기도 한 바 있다. 이곳의 금반장은 올바른 명당지가 아니다. 작은 규모의 비보는 가능하나 명당 전체를 산석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고 그를 인정하는 풍수론도 없다.

금반장은 3대 출재상이란 명당지다. 이곳에 무덤이 없을 수 없다. 지금 금반장의 자리에는 거대한 고무덤이 한 기 있다. 8기의 무, 문인석과 거대한 상석이 예사롭지 않다. 무, 문인석은 높이가 2미터에 달하고 12지신을 양각한 조각의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12기의 무, 문인석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며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묘비는 없다. 묘비와 석등 등이 없어진 것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 고무덤이 관리가 끊긴 지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무덤은 수백 년 되었고 주인은 홍씨며 홍경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 전한다 증언한다.

조선은 장례법이 엄격한 나라였다. 무덤의 크기와 각종 기물의 엄격한 지침이 있었다는 말이다.

묘비명은 없으나 이 고무덤의 무인석과 망주석 등의 규모와 예술성을 비추어 볼 때 무덤의 주인은 정1품의 정승이거나 대군(大君)급이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 고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탐문하기로 하고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주목하여 홍경래의 난과 관계 있는 정승급 인물들을 조선 상신록과 청금록 등에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홍경래난과 관계된 그 정도의 인물들은 없었다.

면과 군등 행정기관의 문화재 기초자료 목록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오히려 마을 주민들보다 자료가 없었다. 보물급(?) 유적이 산등선 위를 굴러도 모르는 것이 행정이다. 내친 김에 이 지역을 근거로 조선조에 정승급 인물들을 모두 찾아보았다. 그러나 인물도 몇 되지 않고 또 그들과는 연관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목면 면사무소 앞에 있는 비석군(碑石群)에서 한 가지 단서를 잡는다. 비석군은 옛날 정산 현감을 지낸 수명의 비방비다. 그 속에 정체 불명의 비석 한 기가 섞여 있었다. 비석은 완전 파괴되어 귀수(머리)와 글자 두 자가 겨우 보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귀수의 미적 탁월함은 금반장의 다른 것들과 매우 잘 어울린다.

주민들의 말로는 오래 전 논 가운데를 구르는 것을 주민들이 발견해 이곳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홍경래를 증언하던 백곡리 주민들의 말이 떠오른다. 금반장의 주인공이 어느날 묘비가 파괴되는 일을 당했던 것을 시사 하는 대목이다. 남은 비석에는 옹정이란 두 자가 있었다.

옹정(雍政).

옹정은 중국 황제 옹정제(1722-1736)의 연호로 영조 초기다. 나는 이 단서를 토대로 영조조의 세도 가문이던 풍산 홍씨가문을 주목하고 그들 홍씨의 족보를 탐문했다. 명산론에 기록된 명당지에 무덤을 쓸 정도라면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인물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은 묘비가 파손된 인물이다. 그것은 일정한 시기에 환국(정치 교체)이나 기타 사건으로 한 번 화를 입은 사람이 분명하다. 과연 나의 판단은 그럴 듯했다. 풍산 홍씨 족보에서 한 인물이 죽어 무덤이 호서에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할아버지뻘 되는 모 인사였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환은 영의정으로 당대를 풍미하다가 후에 정조에 의해 사사된 인물이다. 이곳에 무덤의 주인공의 이름을 꼭 적을 필요는 없겠다. 홍봉환의 봉변시 그 아비의 묘비도 파손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 시대는 그런 일이 빈발했다.

금반장은 명당지가 아니다. 그곳에 무덤을 썼던 인물은 한 대를 지나지 않아 묘비가 파손되는 화를 당했다. 혜경궁 홍씨가 아니라면 묘비는 물론 시신도 보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두사충이나 조선의 풍수객들의 안목이 그르다는 것은 아니다. 고고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대임을 알면 이해도 간다.

금반장은 지금 남아있는 유물만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 묘지의 정비와 무덤의 주인공의 재조명을 통하여 교육적 자료로 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