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해마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팬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주고 있는 한국바둑리그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올스타전을 선보였다. 한국바둑리그 홈페이지와 사이버오로 홈페이지를 통해 팬들의 손으로 직접 올스타를 뽑았던 행사는 ‘팬들과 함께하는 한국바둑리그’란 슬로건에 맞게 팬들의 참여 마당을 넓히는 참신한 기획성이 돋보였다.
온라인 투표 항목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0명의 올스타 선정, 상반기 베스트 명국, MVP 후보 등 다양한 메뉴를 내놓았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상반기 베스트 명국 선정이었다. 매주 사이버오로와 바둑TV를 번갈아가며 생중계를 애청하던, 자칭 바둑리그 골수팬(?)이라 말하고 싶은 기자에겐 어느 대국이 1위에 선정됐을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팬투표가 모두 마감되고 결과가 발표된 날 ‘그럼 그렇지!’하고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는데 역시나 내가 투표한 대국이 1위에 올랐다. 명예의 1위는 바로 이창호 9단과 조한승 9단의 대결.
개인적으론 한국바둑리그뿐만 아니라 올해 최고의 명국 후보로 넣어도 손색이 없다 추켜세우고 싶은데 이쯤 되면 어떤 대국인지 상당히 궁금해 질 것이리라. 미리 보신 팬들은 그다지 궁금하진 않을지 몰라도 못 본 팬들을 위해 기보를 소개해 볼까한다.
팬들이 이 바둑을 상반기 1위 명국으로 꼽은 이유는 무얼까? 다른 게 없다. 축이 성립되지 않는 돌을 무려 아홉 차례나 끌고 나간 환상적인 센터링으로 흑대마를 옴짝달싹 못하게 낚아채버린 진기명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옆의 기보를 보자. 화제의 그 기보인데 하변 접전과정에서 조한승 9단(흑)이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해 조금 불리해진 형국이다. 형세가 여의치 않다 본 조한승 9단은 흑▲로 널찍하게 전개해 우변 백진 삭감과 우하변 흑진 확장을 엿보며 한껏 버텼는데….
백의 다음 수가 궁금해지는 장면에서 이창호 9단은 돌연 백1로 푹 찔렀다. 응수타진이다. 보통 축머리가 불리하다면 흑은 바로 막지 않고 물러서는 것이 정수겠지만 지금은 축머리가 흑에게 유리한 상황. 조금이라도 실리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조한승 9단의 본능적인 후각은 그를 흑2의 손길로 유혹한다. 그러나 이 수가 비극의 시발점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허, 이것 참! 눈을 의심케 하는 이창호 9단의 다음 한 수가 등장하니 대단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축이 성립되지 않는데 태연히 생축을 몰고 나가는 해괴망측한 그림이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을 노리는 걸까? 혹시 하변 흑대마?
중계를 보는 내내 설마 하변 흑대마를 잡으려고 이런 무모한 결행을 했을까 의심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론 하변 흑대마를 잡기 위한 멋들어진 수순이었다. 선악을 떠나 찌릿찌릿한 전율이 오감을 자극하는 적극적인 돌파였다.
발상의 전환! 보통 이런 선택을 우리는 모험이라 부른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상대방 돌을 공격하자고 할 땐 기대기 공격이 일감이다. 가장 효과적인 공격법으로 알려진 기대기는 미생마를 위협하면서 적당히 다른 곳에 이득을 보자는 수법이기 때문에 큰 피해를 보는 일이 드물어 공격법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창호 9단이 보여주고 있는 저 수들은 기대기 차원을 떠나 매우 극단적인, 시쳇말로 자기 살을 뜯어주고 적의 심장을 도려내는 살기등등한 수법이라 표현해야할까?
어찌됐던 이창호 9단은 축을 이용해 하변 흑대마를 모조리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흑대마가 꼼짝없이 잡혀버린 이후 조한승 9단은 좌상귀 백대마를 잡으러 가는 승부수를 띄워보지만 이창호 9단이 무난히 수습해 버리면서 더 이상 다음 수순은 진행되지 않았다.
참 멋있다. 반상 전체를 바라보고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는 큰 시야가 시원시원하게 다가온다.
멋진 수순들을 다시 한 번 들이켜 보고 있을 때 기억 어딘가 재미있는 바둑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팬들에게 한 번 정도 소개해주고 싶었던 기보인데 위의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몇몇 올드팬들에겐 아직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는 바둑일지도 모르겠지만.
왼쪽 기보를 잠깐 보자. 1974년에 두어졌던 제6기 명인전 도전5번기 3국이다. 당시 조훈현 6단이 명인 타이틀 보유자인 서봉수 4단에게 도전한 대국으로 장면도까지의 상황은 백이 재미있는 국면이다. 흑이 두텁긴 하지만 그다지 힘쓸 곳이 마땅치 않고 실리는 백이 앞서있다.
초점은 서봉수 4단이 좌상귀에서 귀살이를 시도했을 때다. 기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백9자리의 껴붙이는 수가 보장돼 있어서 귀의 백은 잘 죽지 않는다. 흑의 입장에선 백을 아무 대가 없이 살려주면 실리차이가 더 벌어지기 때문에 갈수록 어려워지는 입장.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궁금해질 찰나, 역사에 남을 만한 상상초월의 수순이 펼쳐지는데….
흑6, 8로 백사활을 추궁했을 때 백9의 껴붙임은 당연한 수이다. 백의 수읽기로는 △의 축머리가 있어 9의 껴붙임으로 좌하귀 백대마는 거뜬히 살아있다는 거다. 서봉수 4단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백9를 내리찍었을 때 조훈현 9단은 아는 듯 모르는 듯 흑10으로 강하게 차단한다. 얼핏 보더라도 뻔히 안 되는 수다. 백△의 축머리가 대기하고 있어 10으로 차단할 수 없는데 왜 차단했을까?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수였지만 10으로 차단한 수는 백△로 머리를 내민 상변 백대마를 조준한 저격수의 눈빛이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는가? 이하 흑23까지 안되는 축을 쭉 몰아가더니 흑25로 꽉 이어서 상변 백대마를 그림 같은 수순으로 몽땅 잡아버렸다. 백이 이렇다할 반발 한 번 하지 못한 그림이다. 안되는 축을 몰고 나간 피해도 상당하지만 상변을 잡아버린 대가가 더 크다. 결국 이 바둑은 조훈현 6단의 기발한 상상력이 시발점이 되면서 흑승리로 막을 내렸다.
재미있다. 30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공 속에서 스승과 제자가 보여준 수들이 어쩜 이리도 기발하면서 비슷할 수 있는지. 그 스승의 그 제자란 말이 잘 어울리는 내용이다.
바둑은 이래서 좋다. 5000년 이상의 역사 동안 같은 판이 한 판도 나오지 않은 것처럼 바둑은 우리네 인생살이와 같은 변화무쌍한 얼굴이 최대의 매력인가 보다. 안되는 축몰이로 대마를 잡은 사연들.
오늘도 나는 이런 바둑을 꿈꾼다. 하지만 내 바둑은 소리만 크게 날 뿐, 반상위에 내리찍는 공허함만 가득하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할 바 모르겠다. 내 다시 10대로 돌아간다면 입단의 꿈을 불살라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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