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거기만 했던 게 아니었어요.”

박여사의 말에 머릿속을 구르던 상념의 필름이 뚝 끊겼다. 얼굴을 든 시선이 박여사와 마주쳤다.

“채일병이라는 분이 운영하는 종교문제연구소에도 걸었어요. 윤교수와 채일병 씨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봤지만 나온 게 없어요. 가끔 윤강일 씨는 전화를 걸어와 내게 자문을 구했거든요. 어떤 질문을 던질 때 그 분은 무척 초조해 했어요. 누군가에게 쫓기는 분위기가 다분했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박여사님, 윤강일이 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윤 뭘까요?”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윤일경 교수와 관계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아참,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책 한 권 드릴게요.”

박여사는 자리를 떴다 금방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달력 뒷장을 뜯어 겉표지를 만든 것으로 <고(蠱)>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어느새 8시가 가까워졌는지 소리를 죽인 티브이에선 오후에 일어난 사건 · 사고를 알리고 있었다. 화면에 클로즈업된 것은 윤강일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폭발하는 바람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로 옮긴 지 1시간 만에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반쯤 탄 현찰이 사고현장에 상당히 남아 있었다는 점에 경찰은 의아심을 갖고 집중 조사를 벌인다는 뒷소식을 아나운스먼트로 전해주었다.

다음날 정오. 과천에 소재한 연구소 입구 신호대기에 정차했을 때 박치수는 의문점을 꺼내들었다.

“탁기자님, 아끼꼬가 윤교수에게 전화한 내용이 뭘까요? 그것도 화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이는데···.”

“난들 알 수 있나. 틈을 봐 윤교수에게 물어봐야지.”

탁원제 역시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 기타 어떤 문화잡지에도 아끼꼬와 윤일경이 연결된 정보는 없어, 어쩌면 다이얼을 잘못 돌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어버렸다. 이러한 생각들은 역사문제연구소의 출입문 앞에 섰을 때 멈추었다. 벨을 누르는 그들을 윤교수가 반갑게 맞이했다.

“전화로 잠깐 들었습니다만, <고(蠱)>라는 책은 5백 부 한정본이에요. 그 책에 대해 물어오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책 첫 장에 고대의 저주가 나오죠.

일반적으로 신령한 영적 체험을 말할 때엔 ‘영(靈)’이란 단어를 사용하죠. 또한 저주 같은 어두운 내용을 다룰 때엔 ‘고(蠱)’라는 용어를 쓰죠. 영적인 사람에겐 항상 기쁨과 좋은 소식이 찾아온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위협적인 어둠이 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영(靈)’이란 글자엔 아랫부분에 ‘무(巫)’가 있거든요. 내가 이 분야의 공부를 할 때 어떤 분이 이런 바둑 문제를 풀게 했어요.”

윤교수는 탁자 하단부에 놓인 바둑판을 위로 올리더니 순식간에 도형을 펼쳐놓았다.

“이건 제가 ‘신격(神格)’에 대한 공부를 할 때 스승님께서 내놓은 문제거든요.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문젭니다. 한번 풀어보시죠.

보시는 바와 같이 세 수와 네 수의 싸움입니다. 흑은 갇힌 돌이고 백은 모양이 사납지만 주위에 응원군이 있습니다. 동문께선 어떻게 두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