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여류기사 팬클럽을 아느냐!

너희가 여류기사 팬클럽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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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여류기사 팬클럽을 아느냐!

2003-07-29 프린트｜스크랩

조금 된 사진입니다.
10년까지는 아닌 것 같고, 5년은 더 되어 보이고.

그런데 누구일까요?
한 눈에 알아보시는 분들이 되도록 많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는 읽어 가시다 보면 아시게 될 듯 ^^;

힌트를 드리지요.
한국기원 소속의 여류 프로기사이며, 올해로 나이는 만 스물여섯(연감을 보니 77년 생으로 되어 있군요).

95년에, 지금은 사라진 세계여류대회인 제2회 보해컵에 나가 준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97년에 여류국수전을 한번 먹은 일이 있지요.(맞나? 뒤적뒤적)

이쯤 되어도 머리를 흔드시는 분은, 더 힌트를 드려봐야 모르실 터이니 그냥 정답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정답은 이영신 3단이죠? 그랬습니다. 이영신 3단!

이영신 3단을 아는 분은 많습니다. 하지만 단연코! 이영신 3단이 한국바둑사 최초의 ‘팬클럽’을 보유했던, 축복받은(?) 여류 프로기사였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어쩌면 세 명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_-)

사연은 이렇습니다.
한때 한국기원 편집부에 근무하던 한 총각 기자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퇴사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용기를 내어 구 모 씨였다는 점만 밝혀 두기로 하겠습니다. ^^
95년 보해컵 결승전은 그러니까 지방, 정확히 말하자면 전남 광주에서 두어졌습니다. 대국자는 중국의 2인자 (1인자는 그때도 역시 루이 9단이었답니다) 펑 윈 여사와 이영신 3단. 뭐 솔직히 연륜, 기량, 단위, 네임밸류, 미모(앗! 이건 아니닷) 할 것 없이 비교가 안 되는 게임이었지만, 당시 우리 바둑계는 “그래도 결승진출이 어디냐”며 놀라워하고 있었지요. 뭐 지금이야 썩 잘 나가고 있지만 그 때만 해도 우리 여류바둑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밀려도 한참 밀렸거든요.

그런데 이 구 모 기자가 보해컵 취재를 위해 수일간 지방 출장을 다녀오더니만, 불과 고 며칠 사이에 우리의 이영신 3단에게 홀딱 반해가지고 왔다 이겁니다.
아아, 물론 이십대 중반의 남자가 이성에게 가질 만한, 그런 늑대형 케이스는 절대! 아니고(당시 이영신 3단의 나이 18세였습니다 -_-), 바둑인의 한 사람으로서, 팬의 한 사람으로서 보내는 순수한 플라토닉 애정이라는 점을 … 구 모 기자가 누누이 강조하더군요.(사실 누누이 강조한 것이 수상함을 더 하였지만)

드디어 며칠 후, 눈 오는 저녁.
왕십리 모 처에 집결한 구 모 기자와 양실짱은 모종의 거사를 도모하기로 의기투합하였고, 우리의 진한 맹세를 한 잔의 소주에 타 목으로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족발 안주 한 조각.
거사의 내용은 물론 한국 바둑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여류프로기사 공식 팬클럽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고, 결국 96년 연초, 눈이 펑펑 내리는 왕십리 뒷골목 한 허름한 족발집에서 우리는, 이영신 초단(당시)의 단독 팬클럽을 창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아!!

회장은 구 모 기자, 회원은 양실짱.
달랑 임원 한 명에 회원 한 명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조촐한 팬클럽이었지만, 며칠 뒤 우리 둘은 당당히 이영신 초단을 찾아가 (실은 우연히 편집부 앞을 지나가길래) ‘귀하의 팬클럽을 창단하였노라’는 희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이영신 초단의 표정이 어땠냐구요?

ㅇ.ㅇ;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이 전대미문의 이영신 초단 팬클럽은 그러나, 그 장대한 처음의 뜻과는 달리 활동은 지극히 미미하였고, 가장 두드러진 활동이라 해봐야 임원과 회원이 모여 술잔을 앞에 놓고는, “우린 이영신 팬클럽이야!”하며 서로의 불타는(?) 사명감을 재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아, 또 있군요. 편집회의 때, “이번엔 누굴 표지로 하지?”라던가, “이번 특집엔 누굴 다루지?” 등의 안건이 나올 때마다 “이영신 초단이요!”를 열심히 외쳐댔던 (이건 거의 임원이 도맡아 했습니다) 활동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고, 그나마 한 명 뿐인 임원은 사직을 하고 바둑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영신 초단은 구 모 회장의 사직 소식을 듣고는 편집부로 직접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마4단 기력의 구 모 기자와 바둑판을 마주 하고는마지막 ‘송별기(送別棋)’를 두어 주었다지요.

어쨌든 덜렁 회원 하나 남은 팬클럽은, 그나마 서로간의 사명감을 재확인하는 최소한의 활동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고 갈수록 빛이 바래져 갔습니다.

그런데 이영신 초단은 이 한심한 팬클럽을 그래도 많이 생각해 주고 있었나 봅니다.
경희대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서예 동아리 전시회에 이 게으른 회원을 초대해 주기도 했고, (위에 사진 보이시죠? 저거 이영신 초단이 직접 쓴 거랍니다) 오다가다 얼굴이라도 마주칠라치면 어김없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이젠 이영신 초단도 여류기사 중 ‘왕언니 그룹’에 속하는 중견(?)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긴 한해원, 현미진, 하호정, 김태향 등 이쁘고, 발랄하고, 엔터테인먼트 기질이 뛰어난 후배들 세상에서, 수줍음 많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의 이영신 초단은 눈에 ‘확’ 띄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프로기사들을 위한 팬클럽도 이제는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온라인에 말이죠.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해 주세요.
한국바둑사 초유의 여류기사 팬클럽은,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이영신 초단 일인을 위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비록 정관도 회비도 없고, 임원 하나 회원 하나 덜렁 둘 밖에 없는 황당무계한 팬클럽이었지만(대회에서 입상하면 꽃다발은 고사하고 ‘한턱’내라 졸라댔다는 -_-) 그래도 우리는 팬클럽 문화 한 점 없는 척박한 이 땅에서 일송정 푸른 솔과 혜란강을 뒤로 하며, 선구자의 말을 힘차게 달렸노라는 거 아닙니까.

이 글을 쓴 오늘도 2층 대회장에서 우연히 이영신 3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의 환한 얼굴로 이 한심한 회원에게 먼저 인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인사 받기 …

미안해 죽겠습니다 ㅜ.ㅜ

※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다 보니 이런 사진이 나오더군요 ^^;
이영신 3단의 어릴 적 가족사진인가 봅니다. 85년 2월 21일이라는 날짜가 프린트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영신 초단이 8살 때 모습이로군요. 그런데 어머님의 포즈가 환상적이십니다 -_-;
이 사진은 오로 독자 여러분께 개봉한 후, 본인에게 돌려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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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연

｜ 2003-07-29 오후 2:57: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