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되고 보니 어사대가 발칵 뒤집혔지만 범행은 순식간에 조립되었다.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던 부자(附子)를 털어넣고 절명했다는 보고였다. 태후전의 우환거리인 또출이 문제가 해결된 이 날, 옹추공이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태후전(太后殿)을 찾아들어 분위기는 그런대로 눅눅함을 벗어나고 있었다.

“태후마마, 마마의 존안을 뵙고자 소인 옹추공 월성에 들어왔나이다.”

“어서 오세요. 그래, 잘 지내셨는가?”

“그 동안 태후마마의 명을 받들어 가야의 명주 왕주(王酒)를 만드는데 진력하여 이제야 빛을 보았나이다. 왕주는 특별한 술로 신라주와는 다소 차이가 났나이다.”

“옹추공이 제조법을 알아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그리하여 처음 제조한 것을 태후마마께 진상하고자 이렇듯 왕궁에 가져왔나이다. 마마께서 맛매를 살피시는 게 좋으리라 생각되옵니다.”

파상유리잔에 가볍게 반쯤 채워 입안을 적셨다. 그윽한 야생국화 내음과 약초가 섞여 백 일 동안 익힌 맛이 어우러졌다. 혀 끝에 잠기는 건 다섯 가지 맛매였다. 우선 찹쌀과 누룩으로 빚은 데다 야생국화와 구기자 · 참솔잎이 첨가돼 은은히 풍기는 향내가 일품이다. 이 술이 훗날에 전해진 기록 <가야곡주조>엔 왕주가 백제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술이라 알려져 있다. 그렇다 보니 백제인의 얼과 한이 담겼다는 해설이 붙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술은 곡주(穀酒)로 조선왕조 중엽에 ‘곡류’가 술을 담그는데 규제되자 산중의 약초로 명맥이 이어져 왕실에서 마신 탓에 ‘궁중술’로도 알려져 있다. 유리잔에 담긴 왕주를 마시고 나서 태후는 맛매의 뛰어남을 극구 치하했다.

“오호호호, 두 번 다시 못 마실 줄 알았던 가야의 술을 이렇게 맛을 보니 감회가 크오. 옹추공, 수고 많았소.”

“태후마마께 기쁨을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동안 마마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나이다.”

“일을 시킨 나야 의당 할 일이나 그것을 만든 현장엔 옹추공이 있었잖은가. 우리 신라주는 술의 찌르는 힘이 독하나 왕주는 부드럽고 감미하니 앞으로도 이 술을 많이 이용할 것이오. 일단 양온서(釀醞署) 직제를 고쳐 그곳의 관리 · 감독관으로 공을 추천하고 그 아래 기술자들을 두어 술을 만들게 할 생각이오.”

“예에, 마마.”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이오. 나를 번민하게 하던 일들이 말끔히 해결됐으니 가장 큰 공은 설약사요 그 다음이 옹추공이로다. 내 그대들에게 상급을 내릴 것이오. 설약사는 6부의 대족(大族)이니 향리에 토지를 내려 자자손손 왕실의 은전(恩田)에 고마움을 표시할 것이며 옹추공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리라. 공이 원하는 것을 말하라.”

“마마, 소인 황감하기 그지없나이다. 신이 왕주 제조에 공을 이룬 것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내의 조력(助力)으로 이뤄졌으나 일에 열중한 나머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나이다. 그가 죽기 전에 한 말은, 자신의 아들을 왕가에 마복자(摩腹子)로 넣어 일생을 편히 살며 태후마마께 충성히길 바랐나이다.”

“아이의 어미는 어딨는가?”

“부부가 모두 죽었나이다.”

“그렇다면 굳이 마복자가 필요하겠는가. 옹추공이 왕가의 지친 가운데 후손이 없는 자를 골라 그들의 자식으로 성장하도록 배려하고 자식을 양육하는 비용으로 얼마간 나라에서 지원하도록 하라.”

“참으로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아이는 어딨는가?”

“소신의 집에 있나이다. 이름을 비담(琵曇)이라 지었는데 두 눈의 기상이 몹시 빼어나 큰일을 하리라 생각되옵니다.”

“가만, 가만···. 아이 이름을 비담(琵曇)이라 했다?”

“그러하옵니다.”

“그 이름자는 상당히 불길하도다. 제왕들과 어깨를 견준다는 뜻이 아니냐?”

“?···.”

“구슬(玉)이 겹으로 겹쳤으니 제왕들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아래 견줄 비(比)가 자리잡았으니 필경 나라에 해를 끼칠 이름이로다. 그 아이 이름자를 비담(毗曇)으로 고쳐 데려 오라. 비록 왕실에서 자라나도 농사꾼처럼 흙을 다투는 것이야 상관없을 것이다.”

“예에, 마마.”

“그 아이가 젖어미의 수중에 있느냐? 그렇다면 내일 젖어미와 아이를 궁으로 데려오라.”

“예에, 마마.”

“오랫만에 가야명주가 들어왔으니 이 기쁨을 주상과 나누어야겠다. 옹추공은 그만 돌아가도 좋다.”

부복하고 나온 옹추공은 웬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지소태후가 비담의 이름을 고친 건 왕실에 닥칠 만약의 사태를 우려한 것이지만, 글자는 그 나름의 시운(時運)이란 게 있었다. 비담의 ‘비(琵)’ 자는 겉으로 보기엔 두 임금이 서 있는 모양이지만 이것은 임금이 아니라 구슬(玉)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두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이다. 글자대로 풀이한다면 비담의 이름엔 ‘두 여인이 있다’는 걸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비(毗)’자로 바꾸고 보니 묘한 뜻이 생겼다.

‘비(毗)’는 전(田)과 비(比)로 나뉜다. 전(田)은 ‘열 남자’를 뜻하는 십구(十口)로 쪼개져 비담의 힘이 열 남자를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비담의 이름자 속에 반역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왕주(王酒) ; 가야의 명주

▲마복자 ; 신라의 고유한 양자 제도

▲비담(毗曇)은 태어날 때부터 반역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파상유리잔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