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전력이 있고 보니 또출이에 대해 넉넉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곳에 있던 날 태자가 개에 물려 죽었다는 말에 살기는 글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지소태후의 부르심을 받고 북문을 출입할 부도(符圖)를 보여줬기에 설약사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녀는 일절 아는 체를 삼갔다. 이렇게 되면 일하기가 더욱 수월해진다.

“자네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또출일 월성에 불러올린 건 설씨 성을 쓰는 나였네. 노리는 과녁은 태자마마가 아니라 요망한 미실이었는데 일이 엇나가 잘못 풀린 것이네. 내가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은 비밀을 드러낸 것이고, 이게 지켜지지 않는다면 의당 자네에겐 자객이 찾아들어 명줄을 끊어가겠지.”

“···.”

“일이 밖으로 번지면 누구보다 내 목숨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자네에게 얘기한 건 이 일의 다음 과녁을 자네가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 일에 대한 흐름을 알고자 어사대 판관이 또출이와 약속했다는 말을 들었네. 살려주기로 약조한 모양이야. 처음부터 그에 대해 있었던 것은 아니네만 또출이 그 자가 뇌옥(牢獄) 안에서 안하무인으로 떠드는 통에 그 일에 관계된 여러 사람이 거덜나게 생겼다네. 아니 할 말로 자네도 회자수(劊子手)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어. 해서···.”

“쇤네의 목숨이 별 게 아니라 해도 또출이 장난에 죽을 수는 없습니다. 쇤네가 나으리의 손 안에 들어가면 사는 길이 생기겠지요?”

“그렇다 할 수 있네.”

“나 역시 이번 일에 또출이처럼 이용을 하고 죽일 것이라면 아예 지금 죽이십시오. 남들은 나를 일러 천한 것이라고 수군거리지만 그래도 맹세한 약조만큼은 명줄이 끊겨도 지켜나가는 우매한 의리는 있는 몸입니다. 나으리가 사내의 이름을 걸고 쇤네를 살려준다면 신명을 다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설약사는 만만치 않은 계집이라 보았는지 잔가지를 털어버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자네가 어찌 나오는가에 따라 손을 쓸 생각이었는데 이토록 선선히 내 말을 받아주니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드네. 자네와 또출이가 어떤 약조를 했는지 모르겠네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 자의 입을 막아야겠네.”

“하오면 죽이라는 것인가?”

“뻔한 일 아닌가. 처음에야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입이 가벼우니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네. 종기란 게 그렇잖은가. 그게 곪아 내 살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기회가 왔을 때 짜내는 게 당사자에게 이로운 일이지.”

“알겠습니다. 쇤네가 처릴 하지요.”

“자네가 그리해주면 닷새 후인 이달 보름날 밤에 태후마마의 물건이 북문을 통해 들어올 때 자넬 입궁시켜 궁에 있도록 하겠네. 자네에겐 내명부에 직책을 내릴 것이니 수하를 거느린 채 태후마마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네. 아시겠는가?”

“아, 예에.”

“내일 밤이 좋을 것으로 보네.”

설약사는 두툼한 염랑을 초화에게 던져준 채 말꼬리를 은밀하게 내렸다.

“염랑 안엔 자네가 쓸 얼마간의 재물과 어사대 위치를 그린 지도가 있네. 실수 없도록 하게.”

“염랑 안엔 나의 신표에 먹물을 찍은 부도(符圖)가 있으니 성문을 통과할 때 출입의 표시로 그걸 내놓게. 이상히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야. 그리 알고 나는 갈 것이니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념하게.”

“아, 예에. 걱정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그 밤이 지나고 다음날이 왔을 땐 날씨가 몹시 침침했다. 한가위의 만월이던 달빛은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았으나 일기는 북쪽에서 일어난 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니더니 오후 늦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초화가 보퉁이 하나를 품에 안은 채 어사대를 찾은 것은 밤이 꽤나 이슥한 술시(戌時) 어림이었다. 지하 뇌옥에 구겨진 채 따분한 하루를 보내던 또출이는 반짝 생기가 돌았다.

“아니, 이녁이 어쩐 일이야 이 시각에?”

“가만, 가만. 목소리 좀 낮춰.”

“왜?”

“어젯저녁에 약사라는 자가 우리 유곽에 왔었어.”

“설약사가?”

“그래, 그래. 그 자가 돈 몇 푼 집어주고 으름장을 놓으며 하는 말이, 이녁이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살릴 방도가 없다는 게야.”

“뭐어?”

“나 역시 이녁과 정분을 나눴으니 살 생각을 말라고 으름장을 놓더구만. 해서, 내가 이녁을 만나봐야겠다고 했더니 먹물 묻힌  종이를 주더구만. 이녁은 살만한 길을 열어놓지 않았어?”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었지.”

“오늘부터 옥사에 넣어주는 음식은 일절 먹지 말어. 틀림없이 이녁에게 해로운 음식일 거야.”

“응, 알았어. 그런데 보퉁인 뭐야?”

“혹시 몰라 신라주 좀 가져왔지.”

“그거 잘 됐구만 출출한데 좀 마셔야겠어.”

“아직은 사람들 출입이 있으니 밤이 깊어지거든 마셔. 그리고 이녁의 목숨을 구할 사람이나 생각해 둬. 내일 다시 올 테니까.”

“알았어. 가는 길에 조심해.”

그러나 또출이에겐 그 밤이 마지막이었다. 처음엔 의심이 들어 옥사장에게 한 잔 건네는 것으로 상황을 살폈으나 이상이 없자 통째로 술병을 든 채 병나팔을 불었다. 그러던 그가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독은 밀랍(蜜蠟)이 되었다가 그게 녹으면서 치명상을 안겨준 것이다.

▲술시(戌時) ; 일곱시에서 아홉시 사이

▲회자수(劊子手) ; 망나니

▲부도(符圖) ; 신패에 먹물을 묻혀 찍은 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