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약속이었다. 그것을 침전에서 했다 할지라도 신라를 다스리는 제왕의 약속이니 이제 사도왕후가 쫓겨날 일은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초보단계를 지나면 쌍련(雙輦)을 이용하는 중급 단계를 실험할 수 있으니 조루(早漏)로 허덕이던 대왕으로서는 대단한 발전이다.

중원이든 삼한이든 당시엔 성생활의 교전(敎典)이 한결같이 도가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건 유학을 따르는 <주례(周禮)>였다. 거기에 있는 내용에 의하면 수많은 여인이 우글거리는 왕실에서는 제왕의 잠자리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현대인에게도 전통 혼례를 하는 경우엔 <계지(戒指)>와 <면적(面赤)>을 사용한다. 신라가 신국(神國)을 자처하며 중원에서 받아들인 문화유산이라고 하나 이것은 옛 고조선(古朝鮮)의 유습이다.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에 물든 이 땅의 썩은 유학자들이 몇 푼의 재물에 내던진 퇴폐물이다.

현대인들도 혼인하면 결혼 예물로 상대방에게 줄 반지(環)를 준비한다. 오랜 옛날에는 금이나 은 등의 보석류를 이용한 반지가 귀해 가장 대우를 받았던 게 옥(玉)이었다. 옥으로 만든 반지도 귀한 탓에 여인의 이름으로 귀히 쓰이는 게 옥환(玉環)이었다.

현대에도 혼인에 대한 예물로 사용될 정도로 귀히 사용된 반지는 어떤 용도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왕손의 씨를 구별할 때 사용된 귀한 물건이었다. 왕궁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다. 제왕은 어느 여인이라도 불러 잠자리를 할 수 있으므로 그 옆엔 거세당한 사내가 대기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훗날에 나타나는 내시(內侍)다. 이들은 내명부에 몸을 담은 채 자라처럼 목을 늘이고 여인들의 자태를 눈여겨 보는 게 일상 업무다.

<주례>에 의하면, 황제는 후궁에 다음과 같은 인원을 둘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형식적인 기록에 불과하지만 명목상의 기록은 그렇다는 말이다. 한 명의 비(妃)와 아홉 명의 부인(夫人), 아홉 명의 빈(嬪), 스물일곱 명의 세부(洗婦), 여든한 명의 여어(女御)였다. 왕조가 바뀌면서 숫자와 직위는 달라졌지만 기록에 의하면 후궁 1천 명이나 3천 명의 여인이 황제 한 사람의 손길을 받기 위해 항상 대기하다 보니 이들을 관리하는 부서가 필요했다. 그것이 내시부(內侍府)였다.

중원과는 달리 당시 신라 왕실은 내시 제도가 없었고 왕족들의 건강을 다스리는 ‘약사(藥師)’ 제도가 있었다. 내시가 사내의 상징물이 거세된 반면 약사는 온전한 몸으로 왕실을 출입하다 보니 껄쩍지근한 사연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잡다한 얘긴 뒷전으로 밀려난 채 베일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왕자만 셋을 생산한 사도왕후가 <계지(戒指)>에 대해 꺼내자 대왕은 의미있게 받아들였다.

“마마, 중원에서는 오래 전부터 왕손들의 탄생을 몹시 중히 여겼나이다. 신라는 중원처럼 내시 제도가 없으니 신첩은 왕손이 태어나는 것을 반지로 대신함이 옳다고 보옵니다.”

“반지로요?”

“그러하옵니다, 마마. 내명부 여인이 하룻밤 마마를 잠자리에 시중 들면 날짜를 기록한 반지를 내려 끼우고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일이 흘러 아이를 포태한 징험이 나타나면 그 날짜를 반지에 기록하여 끼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 보여집니다. 그리하면 내명부에 있는 여인이 함부로 마마의 씨라고 우기지 못할 뿐더러 자신의 행동 자체도 조신하게 하리라 봅니다.”

그러니까 반지는 여인들이 모양새로 끼고 다니는 게 아니라 왕족을 잉태했다는 자랑거리로 여기는 게 바른 답이다. 그렇다면 <면적(面赤)>은 뭔가? 이것은 몸에 달거리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제왕의 청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몸이 깨끗지 못하니 잠자리 시중을 할 수 없다는 의사표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왕실의 존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도왕후의 주청을 대왕은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왕후는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했다. 대신들의 조회(朝會)였다. 이것은 중원의 여러 나라, 특히 수(隋)나라의 제도를 본 따 하룻밤을 5경으로 나눠 초경은 오후 8시, 2경은 오후 10시, 3경은 자정, 4경은 새벽 2시, 5경은 새벽 4시로 하고, 5경5점이면 아침 6시로 밤이 끝났다.

1경은 다시 5점으로 나누어졌으니 대왕이 아침 조회를 받기 위해 나오는 시각은 계절에 관계없이 새벽 5시 5분쯤 되는 시각이다. 시계가 없던 때니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바닥에 구멍을 뚫은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 밑에 그릇을 놓았다. 밑에 있는 그릇 속에는 눈금이 그려진 화살이 세워져 있어 그것에 의해 시각을 알아보았다. 그 그릇을 누호(漏壺)라 했고 그 장치가 누각이었다. 누각 옆에는 언제나 누각생(樓閣生)이 있었고 누각 박사 3인이 일을 가르치며 감독했다.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1경마다 북을, 1점엔 종을 쳤다. 지금의 시계 같진 않았으나 그래도 정확했으므로 신하들은 보통 4시경이면 일어나 조복으로 의관을 갖춰 서둘러 입궐해야했다. 여름은 그렇다 하나 밖이 한밤중인 겨울철의 새벽출근은 아무리 익숙해진 자라도 대단히 고역이었을 것이다. 사도왕후는 조회시각을 바로잡아야 왕실이 바로 선다고 주장한 것이다.

   ▸계지(戒指) ; 대왕과 잠자리를 하면 날짜를 적은 반지를 내리는 걸 말한다.
    ▸면적(面赤) ; 여인의 몸에 달거리가 생겨 잠자리에 들지 못함을 뜻한다. 이 계지와 면적이 현대의 결혼에도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누호(漏壺) ;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항아리
    ▸쌍련옥벽 ; 중급 단계의 여인에게 내리는 옥으로 만든 노리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