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가 있는 하늘은 서둘러 어둠을 뱉아놓았다. 시각이 그렇게 많이 되지 않았는데 사도왕후가 거처하는 월지궁(月支宮)엔 빗소리에 쫓겨간 더위가 어름어름 창가를 기웃거렸다. 비를 불러온 탓에 만월성의 지소태후는 연회를 베풀어 하늘의 뜻에 감사했지만 월성의 진흥왕은 남당에 측근들이 찾아들어 지소태후의 ‘수렴청정’이 길어진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돌아간 뒤였다. 신시(辛時)가 가까워 올 때 왕후의 시비(侍婢)가 남당을 찾아들었다.

“대왕마마, 월지궁의 시비가 당도했나이다. 마마의 건강을 위해 왕후마마께서 원숭이 주전자를 꺼내놓으셨다 하옵니다. 정무를 마치신 후 들리시라는 전갈이옵니다.”

“지금 갈 것이다. 약사는 길을 열어라!”

진흥왕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월지궁에 도착했다. 평소 양위마마는 지소태후의 눈길을 피해 약속을 주고받았었다. 아드님을 셋이나 낳았지만 늘 편치 못하다보니 상대방을 찾을 때는 술잔이며 주전자 또는 그림 등속을 사용해 상대의 마음을 가만히 충동시켰다. 자신의 기분을 나타낼 때도 좋을 때보다 슬픈 일이 적지 않다 보니 우스꽝스러운 동물 표상을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원숭이를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왕은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월지궁의 왕후처소를 열었을 때 바람처럼 밀려온 건 소흥주(紹興酒) 냄새였다. 중원의 민간에서는 딸을 낳았을 때 몇 동이의 술을 담근다고 했다. 그렇게 담근 술이 열다섯 해 남짓 땅속에서 익어가면 딸아이가 시집갈 때가 된다. 그때 손님을 청해 입구의 개봉을 풀고 술잔을 기울이는 운치가 있었다. 그러나 소흥주는 고급주다. 시기와 때에 따라 한 말에 천금이 나갈 때가 적지 않다 보니 술의 이름만큼 가격이 비싼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소태후의 섭정으로 기가 움츠려 들다보니 술을 가까이 하지 않은 대왕이었으나 수렴청정의 기간이 길다보니 사이사이 술을 마시게 되어 사도왕후와 자리를 같이할 때면 몇 잔의 술로 생채기 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오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왕후께서 과인을 청한 것은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함인데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과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보다 나를 비웃어 줄 일이라도 있습니까.”

“마마, 간밤 꿈에 원숭이가 어찌나 애닯게 우는지 신첩은 잠을 이루지 못했나이다.”

“아니 무슨 일로?”

“원숭이는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통하지요. 언제나 남들의 우스개 장난질에 이용당하고 종내는 그의 뇌(腦)마저 미식가들의 입맛을 당긴다지 않습니까.”

“그런 원숭이가 왕후의 꿈길에 나타났습니까?”

“신첩의 어리석음이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이지요. 그리한 탓에 단장(斷腸)이 끊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중원에서 건너 온 <세설신어(世說新語)>란 책에 의하면 진나라의 환온 얘기가 나옵니다. 그가 촉나라로 가던 중 삼협(三峽)을 지나게 됐는데 그의 시종이 숲속에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왔답니다. 배가 떠나자 원숭이는 슬피 울부짖으며 쫓아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배는 백여 리를 훨씬 지나 포구에 이르렀는데 먼길을 달려온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가 있는 배 위로 훌쩍 뛰어 올라 죽고 말았습니다. 배 안에 있던 자들이 원숭이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한 치 길이로 토막토막 끊겨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 슬피 우짖는 바람에 창자가 끊긴 거지요.”

쓸쓸한 표정의 사도왕후 입에서 한 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장(斷腸)에 관한 내용이었다.

촉나라 산과 물은 푸르렀건만

성주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어떠했을까

행궁에서 달을 보니 상심은 더하고

밤비에 방울소리 들으니 창자가 에이누나

(蜀江水碧蜀山靑 / 聖主朝朝暮暮情 / 行宮見月傷心色 / 夜雨聞鈴腸斷聲)

진흥왕의 잔에 술을 치며 사도왕후는 슬픈 눈물을 흘렸다. 이제 자신이 택할 길은 진흥왕과 세 왕자들의 강령함을 바라며 조용히 성을 나가는 길이라 했다.

“태후께서 월성에 돌아오시면 신첩은 퇴박을 당해 사가로 쫓겨갑니다. 원숭이가 창자가 끊어진 것도 모르고 먼 길을 달려 온 것은 모두 자식을 생각한 탓이 아니옵니까. 신첩은 궁에서 쫓겨나더라도 마마께서 왕자 아기씨들만 보살펴 준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나이까. 지난밤 신첩의 꿈길을 찾아온 원숭이가 마지막 선물을 내게 남긴 게 ‘원박(猿搏)’이었나이다.”

“원박이라니오?”

“신첩도 전해들은 말이니 어떤 것인지는 모르옵니다. 대왕께서는 오늘밤 신첩과의 마지막 잠자리를 하소서. 대왕의 잠자리를 신첩이 거들겠나이다.”

▸신시(辛時) ; 오후 6시 반에서 7시반 사이

▸남당(南堂) ; 월성의 정무를 보는 대왕의 정전

▸원숭이 주전자는 상대방을 희롱하는 것보다 특별한 목적의식으로 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