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은 곧 사도왕후의 처소로 향했다. 누구보다 깊은 상심에 젖었을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왕후는 고통스러운 근심을 날 새도록 지우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왕후의 자리에 오르고 왕자 아기씨를 생산했을 때 천하를 얻을 것 같았던 포부는 어느새 바람 빠진 족구(足球) 공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잠을 청한 것도 아니었다. 눈만 감고 있었다. 의식은 또렷한데 그것들은  부표(浮漂)처럼 흔들리며 마음자릴 어지럽혔다.

“왕후마마, 세종 전군을 천침(薦枕) 드는 미실 낭주께서 찾아왔나이다.”

“일 없다. 머리가 지끈거리니 다음날 오라고 해라.”

왕후 처소의 시비(侍婢)는 곧 나갔다가 이내 얄따른 서책을 들고 왔다.

“마마께서 이걸 보시면 어려움을 물리칠 것이라 하옵니다.”

턱짓으로 ‘저쪽에 놔두거라’ 명령을 내리던 시도왕후는 무슨 생각에선지 불쑥 일어나 그것을 집어들었다. 제목은 없었지만 한 장을 넘기자 안쪽엔 <사내를 죽이는 법술>이라 쓰여 있었다. 특별한 건 아니겠지 싶은 생각에 주르르 넘겼다. 전체를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네 개의 장(章)으로 나누고 자잘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더구나 서책 안엔 아주 작은 표주박처럼 생긴 물건이 들어 있었다. 신라 왕실에 알려지기 시작한 미약(媚藥)이었다.

왕후는 손뼉을 쳤다. 그녀 자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진흥왕은 요즘 심기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정사는 자신이 명을 내리지만 실제적으로는 지소태후의 입김이 거셌다. 만월궁에서 올린 기우제 덕택에 모을지(毛乙支)가 내을신궁의 신녀로 도장이 찍혔다는 점도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나약한 자신이 마음을 아우르고 부족한 것을 신께서 채워줄 여인이어야 했는데 기우제를 올려 비를 내리게 했다는 것만으로 신궁의 주인이 됐다는 건 몇 번을 생각해도 당치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진흥왕만의 생각이겠는가. 사도왕후 역시 마찬가자였다.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닥치면 신에게 제물을 올리고 호소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을 움직이면 중신들의 마음을 잡아챌 수 있으니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라도 좋은 결론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차단한 지금 사도왕후의 처지는 태후의 손짓에 따라 왕궁을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방법이 생긴 것이다. 미실이 가져온 얄따란 책자가 희망의 길 안내를 해 주었다. 사도왕후의 명을 받은 시비가 황급히 문밖으로 나서자 수국(水菊)이 널브러진 정원에 서있는 미실을 발견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게.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난 꼼짝 않고 있었네. 그래 왕후마마가 찾으시던가.”

“예에.”

“가세.”

미실이 앞장 섰다. 여전히 비는 오르락 내리락 중이었지만 지금은 그친 상태로 하늘엔 시커먼 구름이 바람그네를 타고 있었다. 미실이 들어오자 사도왕후는 손부터 잡아끌었다.

“조금 전에 자넬 모른 한 것은 심려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네.  궁안에 퍼진 소문처럼 이 나라의 왕후인 내가 아무 이유없이 쫓겨난다는 게 얼굴을 들고 다닐 처진가. 눈을 뜨면 슬픈 생각뿐이고 잠 들면 흉몽이니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비몽사몽이네. 세종 전군을 시종(侍從)드는 자네가 내 처지를 생각해 비방을 마련해 주니 내가 어찌 가만있겠는가.”

미실은 부여잡은 왕후의 손을 가만히 놓고 쌍학(雙鶴)을 수놓은 방석 위에 앉았다. 약간 앞으로 고개 숙인 사도태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자넨 세종 전군의 사람이니 나는 지소태후의 그늘을 쬐는 사람이라 보았네만, 자네가 내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준 것은 뜻밖의 일이었네. 나를 도울 이유가 있었는가?”

“왕후마마, 태후마마가 수렴청정을 거뒀으나 여전히 섭정은 계속되고 있나이다. 마마의 지체로 말씀드리자면 서라벌의 왕후시니 이 세상에 그보다 귀한 자린 없다고 보옵니다. 내명부의 최고 자리에 있으면서도 태후마마의 눈치를 살피는 건 태후마마와 혈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소인은 왕후마마를 돕기로 작정했나이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네만, 그건 너와 나의 생각일 뿐이다. 지금 지소태후는 만월성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남도의 연회’라는 걸 열었다지 않는가. 자신을 따르는 서른 명의 중신을 불러 놀이를 베풀었으나 앞으로는 전투에 나갈 화랑들을 연회에 초청한다고 하니 이것은 자신의 섭정기간을 더욱 늘이려는 뜻이 아니고 무어겠는가. 그렇게 되면 대왕의 명은 유명무실해지고 태후의 득세가 눈에 보듯 훤히 드러나니 이제 천하는 태후의 손아귀에 든 게 아니고 무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소인이 왕후마마를 찾아온 것입니다. 왕후마마, 아무리 태후마마가 섭정기간을 늘리려 해도 정령(政令)은 대왕의 손에서 나옵니다. 태후마마가 개인적으로 정무를 처단한 일이 많아 대왕의 심기도 여간 불편하리라 봅니다. 이 일은 대왕을 움직이지 않고선 방법이 없나이다.”

“허면, 대왕을 움직이는 방법이 네가 준 책자에 있다? 법술이라그 말이렷다. 내가 잠시 살펴보았더니 희로애락(喜怒哀樂)이란 문구가 있던데 그건 무슨 뜻인고?”

“소인이 왕후마마께 드린 법술(法術)은 네 가집니다. 기쁠 때와 화 났을 때, 슬플 때와 즐거울 때로 구분돼 있습니다. 남녀가 음양을 나누는 일은 마치 연꽃이 피는 것처럼 한 번도 같을 수가 없지만 그것을 크게 네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나이다. 만약 오늘밤, 마마께서 대왕의 잠자리에 들어가신다면 마마께서는 ‘노함(怒 )’을 다스리는 곳을 침조해야 합니다.”

사도왕후는 책자를 집어  ‘노(怒)’라고 쓰인 부분을 펼쳐보았다. 그곳엔 ‘시황동녀단(始皇童女丹)’이란 문구가 써 있었다.

  ▸천침(薦枕) ; 잠자리 시중 
   ▸쌍학(雙鶴 방석) ; 내명부에선 무인들과는 달리 정적(靜的)인 동물의 수를 이용한 것 같다.  
  ▸시황동녀단(始皇童女丹) ; 미약의 하나로 진시황이 사용했다고 전한다.
  ▸송곳형 장식은 귀족들이 쓰는 장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