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전 제갈량이란 폐병장이에게 천서(天書)를 훔쳐다 준 호리녀(狐狸女)야. 그로 인해 지금껏 천계에 못 들고 떠돌아다니지만서두. 하긴, 그 폐병장이만 그런가. 오죽이라는 위인도 도무지 못 믿을 화상이지. 이봐요, 내가 화투장 날리는 것 봤지? 한 번 해 볼 거야. 정신 바짝 차리면 할 수 있어.”

처녀가 화투장을 던져주자 어색한 손놀림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장난치듯 주문을 웅얼거렸다.

“그거 뒤집어봐. 새칠팔 떡장수 갑오야.”

화투패는 처녀가 부르는 대로 떨어졌다.

“킥킥킥, 이번에는 오륙팔 앉은뱅이 갑오지!”

어디 그뿐인가. 두 장을 내려놓으면 알팔 군밤 갑오다. 까르르 웃고 나서 도리도리 고개를 젓더니 기합처럼 한소리를 게워놓는다.

“좋아, 이번엔 알팔귀 홀오마니 쌍불알 갑오다!”

과연 화투장은 그녀의 말대로 떨어졌다.

“총각, 지금은 안 되더라도 찬찬히 연습하면 돼! 실망 말고 계속해봐.”

갑자기 눈앞이 번쩍이며 모든 빛이 사라져 버렸다.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돌바닥에 죽은 듯 누워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조금 전 처녀가 뭐라 했지. 제갈량에게 천서를 훔쳐다 준 호리녀라구?'

부르르 몸이 떨렸다. 구천현녀의 시녀 호리녀가 여우의 화신이 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여우 귀신에게 잡혀 기를 빼앗기고 있는 것인가?

여우 귀신!
그의 몸을 으스스하게 엄습한 여우 귀신은 고향 해남에서 서당을 열었던 조부(祖父)의 옛 얘기 속에 등장했다. 그것은 명지관 이의신(李懿信)의 일화였다. 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누워있던 얘기가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긍께, 저쪽 고개였으니 서당은 대충 여기쯤이었을 것이제.”

조부는 가상적인 얘기를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몇 가지 숨겨놓은 비장의 보따리를 곁에 둔 채 입기름을 쳤다. 그것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얼마나 효험이 큰지 알고 있었다.

“둔갑한 여시(여우)와 고렇고 고런 사이가 됐다는 건 혼백이 반쯤 나갔다고 봐야제. 그렇지 않구서야 어찌 여시와 밀애를 하겄는가. 그렇니께 일은 이렇게 된 것이구만잉.”

손바닥을 버릇처럼 탁 치고 나서 군침 도는 얘기를 이어갔다.

“서당에 다니는 이의신이 고개 마루에 오르면 언제나 이쁜 처녀가 기다리고 있었제. 그 처녀는 이의신이 오면 입안에 든 구슬을 토해 사내의 입에 넣어주고, 다시 구슬을 주고 받으며 희롱하고 놀았지. 그럴 때마다 무척 황홀했을 것이지만서두 이의신의 낯빛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핏기를 잃고 야위어 갔제.”

훈장은 그 처녀가 백년 묵은 여우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왕지사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전화위복의 좋은 기회로 삼으려고 이의신을 불러 앉혔다.

“오늘밤 그 처녀를 만나면 반드시 내 말대로 하거라. 처녀가 네 입에 구슬을 넣거든 냉큼 삼켜버려. 알겠느냐?”

이의신은 훈장 선생님 말처럼 처녀가 주는 구슬을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서당을 향해 뛰었다. 울부짖는 처녀(여우)의 울음소리가 소름끼쳤으나 서당불빛을 보는 순간 안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것이 허실이었다. 경황없이 달려오느라 대문에서 안채로 갈 수 있게 놓아둔 디딤돌에 걸려 넘어졌다. 창문을 열어젖힌 훈장의 탄식이 쏟아졌다.

“카하 아깝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보았다면 천하를 거머쥘 영웅이 될 터인데 어찌 땅을 보아 지관이 되었는가?”

조부는 얘기를 마치고 손때가 묻은 바둑판 위에 도형을 깔아놓고 턱밑 수염을 감아내렸다.

“이의신이 여의주를 삼킴으로써 본래의 이의신은 사라진 셈이다. 예전의 이의신이 여우의 정을 받았으니 이제 그의 뼈는 환골(換骨)했다고 봐야겄지? 자, 여길 보아라. 네 놈이 이 모양을 풀면 내가 도시로 학교를 보내주겠다.”

조부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스쳐보며 일우는 눈을 부릅뜨고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얼핏 다가온 느낌은 아무래도 후절수 문제같았다. 그래서 첫 점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