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극돈(阿克敦 1685-1756)은 청나라 사람이다. 그는 영조년간에 네 차례나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로 조선이 전력을 기울여 사신단을 영접하는 데 감동을 받아 화원들로 하여금 무려 20폭 병풍도를 그리게 하여 오늘에 전한다.

영접도에는 청나라 사신단과 조선의 영접관이 지나가는 길옆에서 탈춤, 솟대타기, 외줄타기, 땅구름, 원숭이기예, 불 토하기, 코끼리춤은 물론 불꽃놀이를 벌이는 조선 기예단(악과 무 그리고 광대를 통칭)의 멋진 모습이 생생하다. 영접도에는 박지원과 박제가 등이 연경에서 본 중국 곡예의 장면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청나라 사신의 영접은 조선의 국가적 행사였다. 사신단이 연경을 출발했다는 자문을 받은 조선조정은 의금부와 군기시를 총책임 부서로 하여 사신단의 입국에서부터 출국까지를 관리했다. 의금부는 범죄의 감시와 체포 그리고 심문기관이지만 어쩐 일인지 사신단 영접에는 '영접도감'의 주체가 되어 도성안의 연예 오락인들을 관리감독하며 사신단 영접에 만전을 기했다.

군기시가 의금부와 공조를 한 것은 곳곳에 가설해야 될 무대설치와 폭약을 이용한 불꽃놀이의 시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의 폭죽 제조기술과 생산력은 중국도 인정하던 것이었다. 의금부는 힘이 있던 기관으로 사신단 환영공연을 대비하여 전국에서 이름 있는 기예인들을 모두 징발했다. 기예인에는 광대, 무녀. 땅구름꾼, 소리꾼, 연주인들이 총 망라되었다. 의금부의 징발령을 받지 못한 기예인은 일급 기예인이 아니었다.

아극돈은 영접도감에 수시로 조선의 바둑 고수를 요구했다. 영조는 고수와 바둑기물을 사신단 숙소로 보냈다는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아극돈의 숙소로 불려간 조선의 고수들이 송재도, 조한진 등이다. 숙종때는 장문익, 최설송 등이 주로 불려갔었다. '성해응'은 연경재집에서 송재도의 바둑실력이 능히 바둑의 신(神)과 대적할만하다 했고 조한진은 힘과 협기까지 있는 고수다 증언했다.

역사는 영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 말한다. 영조시대를 잘 표현한 병풍도(圖) 한 점이 있다 (자료1, 영고도)

영고도(英故圖)는 한양대학 소장품으로 정조 말기에 도화서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도화서는 조선의 왕실기관으로 화원 개개인의 미술작품 완성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중요 행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기록하는 '국가영상기록처'의 역할을 한 기관으로, 거국적인 국가 행사를 기록한 대작에는 화원의 이름이 배제된 경우가 많다. 영고도도 이런 경우다.

영고도는 아직 연구가 되지 않은 작품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도화서에 그리게 했다는 정도의 정보만이 제공되어 있다. 영고도는 가로 345센티미터, 세로 99센티미터에, 비단에 담체로 그려진 10폭 병풍이다. 궁중화에 민요풍을 보태어 은근하면서 엄숙함을 잃지 않고 있다.
10폭 병풍도는 세개의 테마가 하나로 통일되는 구도로 되어 있다. 궁안의 한 전각에 늙은 영조가 어린 세손을 무릎 앞에 앉히고 무희들의 연주와 춤을 감상하고 있고 좌우에 문무백관들이 도열하여 참관하고 있다.

4폭에 있는 주방에서는 숙주(남자요리사)들이 궁인들과 온갖 요리를 만들어 내어 궁안의 연회를 더욱 흥겹게 한다. 그러나 왼편 1,2,3폭은 좌측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있다. 그것은 전각 안에서 벌이고 있는 바둑 두는 모습이다. 바둑판 앞에는 두명의 관원이 앉아 대국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막 돌을 들어 착점을 하려는 듯 생동감이 있다. 바둑판 위에 놓인 흑백돌이 뚜렷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바둑판 옆에는 또다른 두명의 관원이 선 자세로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다. 한참 바둑이 무르익는 시간, 전각아래에는 숙주들이 술과 음식을 내와 바둑이 끝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여유로운 조선궁궐의 한때의 모습이다.

늙은 군왕은 어린 세손을 한없이 사랑하고 아낀다. 세손은 장차 조선의 대통을 이을 국본(國本)으로 늙은 군왕은 어린 세손을 즐겁게 해주기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다. 그것은 그림속에 있어야할 세손의 아버지 '사도'의 부재다.

정조는 훗날 자신의 아버지 사도를 바둑과 함께 떠올리곤 했다. 사도는 애기가였다. 영조의 미움을 받아 뒤주안에 갇혀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는 바둑판을 던져 자신의 아내 홍씨의 얼굴을 상하게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했으나 정신적 압박을 바둑이나 활쏘기 등으로 잊으려 애쓰다가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속에서 뒤엉키다 비명에 간 사람이기도 하다.

정조는 영고도 속에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과 자신이 열살 때 죽은 아버지 사도의 슬픔을 함께 담아내라 화원들을 독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조와 정조라는 두명의 조선 군왕이 등장하는 그림 속에 공과 사를 가르는것을 업무로 삼은 조선의 사관들의 말류를 물리치고 바둑이 화제로 등장할 수는 없다.

영조는 정조 못지않게 정치적 시련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형 경종의 재위 4년간은 그야말로 피마르는 나날이었다. 소론과 노론의 정치전 속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군왕의 동생이란 위치는 그야말로 살어름판이었다. 이 상황이 영조를 사치와 잡기 등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그런데도 영조는 바둑에 훤했다고 복수의 사관은 기록한다.

영조시대에는 송재도, 한수대, 이세중 등 일세를 풍미하던 바둑의 고수들이 등장한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필생의 과업을 계승하겠다는 조손간의 약속을 하고 조선의 군왕에 오른다. 정조는 영조의 유훈을 좇아 검소하고 연회나 잡기 등을 멀리하는 생활습관을 견지한다. 정조는 바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가 바둑을 두지 않았다하여 그가 바둑을 모른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조는 바둑을  잘 이해했다.

(가윗다리 바둑이란 말이 있다. 기본적인 준비없이 바둑을 둔다는 말이다. 세상일을 준비없이 치루면 사단이 난다. 모든 일에 주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다. 바둑을 곁에서 보면 수가 잘 보인다.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이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일을 잘 생각하여 처리하라)

이 글은 정조가 죽기전 2년전에 한 신하에게 보낸 서찰이다. 정조는 가윗다리 바둑이란 말과 당국자미방관자심(當局者迷傍觀者審)이라는 당서(唐書)에 나오는 말로 어떤 임무를 진행하고 있는 신하에게 충고를 한다. 정조는 바둑을 아취(雅趣)가 있는 기예로 알았다. 정조는 홍제전서에 자신의 바둑관을 가감없이 토로한다.

(나는 바둑을 잘 모른다. 그러나 바둑이 예부터 문방아기(文房雅技)임을 잘 안다. 문인들이 곁에 두고 심심파적을 삼으면 도움이 된다) (자료2, 홍제전서)

(자료2. 홍제전서 165권. 문방아기를 말하고 있다.)

정조는 조선실록과 승정원일기 홍제전서 등에 곧잘 바둑을 정치에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그가 바둑을 문인들이 고상하게 생각하는 기예라 말하는 것도 새삼스런 게 아니다. 정조는 1787년 새로 간행한 병학지남의 서문에 바둑과 병법을 비교한 절묘한 글을 남기기도 한다. 병학지남은 척계광의 저술로 조선 무인들의 필독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애독서였다.

(군대에 법이 있는 것은 바둑에 기보가 있는 것과 같다. 이 병서를 읽는 자들은 바둑의 고수가 기보가 바둑의 전부로 알지 않은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이것을 안다면 곧 병법을 안다 할 것이다.) (자료3, 홍제전서)

(자료3. 홍제전서 183권. 병학지남 서문)

영정조 시대 조선팔도에는 엄청난 바둑붐이 불었다. 남산이나 칠패 아현 등에서는 수시로 바둑대회가 열렸다. 오군영 대장을 역임한 '정박'은 직접 바둑대회를 개최한 바 있고 이덕무는 어린이 바둑대회의 거창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적도 있다. 이덕무는 어린이 바둑대회에 장막을 줄지어 치고 늘어선 바둑판마다 어른들이 달라붙어 돈을 걸고 한수마다 일희일비한다며 혀끝을 찬다. (자료4, 혁기론) 

(자료4. 이덕무의 혁기론)

부정은 은근하고 튼실하다. 아이들은 그런 아비를 보고 자라야 은근해지고 튼실해진다. 정조는 열살 때 담장바깥에서 뒤주 안에서 명을 접는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는다. 어린 세손이 아버지 사도의 방을 찾아갈 때면 아버지는 곧잘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은 영조가 엄금한 것이었으나 사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는 바둑판으로 어머니 홍씨를 타격한 적도 있다. 어린 세손은 기억한다. 이상성격의 아버지와 바둑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과 눈물...

정조는 아버지 사도의 신원회복에 힘쓰면서도 아버지 사도를 죽음으로 내몬 정치세력과도 잘 타협하며 재위기간 동안 조선을 잘 이끈다. 정조는 바둑은 형세(形勢)가 중요하다 말한 적이 있다. 조선말의 학자면서 행정가인 정원용이 말한 "바둑의 묘리는 형세다"란 말의 복사판이다. 형세는 '관자'에 나오는 말로 세상의 이치는 쓰일 곳에 쓰일 물건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세상을 바둑판의 축소판으로 비교하며 한 말이다.
정조는 수편의 바둑시도 쓴다. (자료5, 홍제전서)

(자료5. 홍제전서 2권. 정조의 바둑시다. 여러 편의 바둑시를 남긴 사람이 정조다.)

 은대에 붉은 주렴 오후 시간은 더디도다.

텅텅, 바둑두는 소리 딴세상 일이로세.

전각에서 맞은 손님 꽃그늘 조용하고

천하의 분주한 일도 한판의 바둑이로고.

정조는 영고도 속에 할아버지 영조의 자애로운 사랑을 담고 그 자애의 그림자 속에 버려진 아버지 사도의 슬픔을 반추하고자 했다. 영고도에 등장하는 바둑의 모습이 그것이다. 조선왕실에 전하는 바둑을 두는 모습을 그린 병풍도는 두점이다.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후원아집도'와 '영고도'가 그것이다.

다시 영고도 속으로 빠져보자. 전각 앞에 가슴에 책을 품은 어린아이가 보인다. 아이의 뒤에는 근엄한 표정의 관원이  따른다. 그도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다. 공부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다. 어린 세손이다. 그가 바둑을 두고 있는 전각으로 간다. 전각 안에는 언제나 그리운 아버지가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정조는 말년의 어느날 불현듯 도화서의 화원들을 집합시킨다. 그리고 꿈결 같았던 어린 세손 시절을 들려주며 영고도를 완성케 한다. 조선왕실에 단 두점밖에 없는 바둑두는 그림은 이렇게 완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