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라? 세종 그 아이가 청조를 마음에 두었어?”

“예에, 마마.”

설추경의 보고에 지소태후는 잠깐 침묵했다. 청조는 미진부(未珍夫) 공의 딸이다. 사다함이 가야 정벌에 공을 세웠을 때 지소태후는 귀당비장(貴幢裨將)에 임명하고 5세 풍월주를 삼았다. 게다가 삼월삼짇날 궁시(弓矢)겨루기를 연 것은 청조를 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함이었다.

마복칠성의 한사람인 아시공의 아들인 그의 부친은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삼엽궁주다. 꿈에 흰 학이 나는 걸 보고 미진부를 낳았다는 소문이 파다할 만큼 잘 생긴 얼굴에 재능까지 있어 비대공 등과 궁중에서 자랐다. 당시 법흥왕이 옥진 궁주를 총애했으므로 비대공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지소태후는 왕실 계통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반대하자 삼엽궁주와 아시공이 동조하고 나섰다.

삼엽궁주와 미진부를 사랑한 지소태후는 진흥왕이 보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며 미진부를 가까운 신하로 삼았다. 나이가 열여섯이었지만 지소태후의 뜻을 잘 맞추었다. 당시 삼산공(三山公)의 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가 되어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법흥대왕의 딸 남모(南毛) 공주는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미진부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지소태후는 미진부의 편을 들어 남모공주를 원화로 삼으려 했다. 법흥왕이 옥진궁주를 맞이하기 전에 남편이었던 영실공(英失公)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높은 관직을 주고 원화를 없애려 하자 준정은 영실공을 섬기면서 남모공주가 원화가 되는 걸 저지하려 했다.

왕의 뜻에 따라 지소태후는 영실공을 계부(繼夫)로 삼았으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미진부에게 명해 원화를 없애고자 했다. 또한 낭도가 부족함을 염려해 위화랑의 낭도를 끌어들여 숫자도 늘려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준정은 남모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강물에 던져 살해했고 그로 인해 원화제도는 폐지되었다. 그 후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를 풍월이라 부르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는데 위화랑의 뒤를 이어 미진부가 2세 풍월주에 오른 것이다.

미진부는 남모공주를 잃은 후 혼인을 않고 있다 법흥왕의 후궁 묘도(妙道)부인과 사사로이 정을 통해 청조와 미생랑(美生郞)을 낳았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지소태후는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모른 척 넘어갔다. 연회를 마치자 그녀를 불러 후당 연못가를 거닐며 백변화(百變花)라 부르는 연꽃을 가리켰다.

“이 못엔 연(蓮)이 있다. 일년 삼백육십일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옷을 갈아입는 꽃이다. 내가 태후가 됐다만 이 꽃을 사랑하는 것은 예전과 다름없다. 너는 화려한 장미나 모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만···.”

“아니옵니다, 마마.”

“아니다?”

“소녀 역시 연꽃이 지닌 열 가지 덕(德)을 사모했나이다.”

청조는 그것들을 가만히 읊조렸다. 연꽃이 지닌 열 가지 덕. 그 하나는 진흙탕이나 거기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니 이제염오(離諸染汚)라 했다. 그 둘은 연꽃 잎에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물지 못하니 불여악구(不與惡俱)고, 그 셋은 계향충만(戒香充滿)이니 연꽃이 피면 물 속의 시궁창 냄새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고결한 인품이 그윽한 향을 품어 사회를 정화한다는 것이다. 한자락의 촛불이 어둠을 쫓듯 진흙탕인 연못을 향기로 채운다. 그 넷은 본체청정(本體淸淨)이다.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

그 다섯은 면상희이(面相喜怡)다. 연꽃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즐거워진다. 그 여섯은 연꽃 줄기가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것이니 유연불삽(柔軟不澁)이다. 유연하기에 어지간한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그 일곱은 견자개길(見者皆吉)이니 연꽃을 보면 길하다는 것이다. 연꽃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으니 그 여덟은 개부구족(開敷具足)이다. 또한 활짝 피었을 때 색깔이 고우니 성숙한 인품을 말할 수 있어 그 아홉은  성숙청정(成熟淸淨)이다.

그때 지소태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생이유상(生已有想)을 말한 것이다.

“내가 연꽃을 보며 좋다고 느낀 건 넓은 잎에 긴 대, 굳이 꽃이 피어야 연꽃인지를 확인하는 게 아니다. 연꽃은 싹부터 다른 꽃과 구별된다. 장미와 찔레, 백합 같은 꽃은 피어야 구별되지만 연꽃은 싹부터 다르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너의 가문은 색공 집안이니 너는 인품이며 자질이 여느 여인과 다르다. 왕실에 들어와 부디 귀골을 낳아야 한다.”

“예에.”

“너에게 짝을 내렸으나 그것은 지난 일이다. 이제 청조(靑鳥)라는 이름을 버리고 네 할미의 바람처럼 ‘아름다운 방’ 미실(美室)이라 하거라.”

“예에.”

“내 아들이 널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 그 아이의 흐트러진 마음을 잡기 위해 오늘의 무도연이 열렸다. 내일 그 아이 처소에서 색공하거라. 이것은 너의 가문을 위한다기보다 너의 장래를 생각한 것이다.”

무슨 말이 있을 수 있으며 거부의 몸짓을 할 것인가. 자신의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청조는 귀를 곧추세웠다. 집안을 위하고 자신의 장래가 걸렸는데 더 이상 핑계의 소고(小鼓)를 두드릴 수는 없었다.

‘아, 이제야 아름다운 방이 되었구나(美室). 나의 방으로 제왕과 왕손을 불러들여 나의 치맛자락이 서라벌을 뒤덮을 것이라!’

▸용양군(龍陽君) ; 용양은 남색이다. <화랑세기>엔 용양군을 왕의 남색, 용양신을 귀족들의 남색이라 했다.

▸계부(繼父) ; 새 남편

▸표범장식은 무인(武人)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