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락엔 한층 봄 향기가 짙어졌다. 여름이 멀지 않으니 숨 죽인 봄 풀들은 발딱 고개를 쳐들고 어둠 속을 기웃거리는 봄바람을 맞이했다. 그칠 듯 말듯 들려오는 향가(鄕歌) 한 자락을 바닥에 깔고 재빨리 다가선 어둠이 넉장 좋게 어스름을 피우고 있었다. 청조는 태극선(太極扇) 부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을 그리듯 선회하며 곡조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음곡은 정(靜)에 가까웠으나 소리마디가 길지 않고 잡아끄는 힘이 있는 풍요(風謠)였다.

신라 학자들은 시(詩)에서 일어나고 예(禮)에 서고 음악에서 이룬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그것은 공자의 말이다. 시로써 방종하기 쉬운 걸 단속하고 금하는 게 서(書)였으나 한번 그릇된 것은 되돌려야 하는 게 역(易)이다.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을 ‘유리’ 감옥에 집어넣었을 때 그곳에서 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생의 가장 괴로운 때, 그런 시기가 닥쳐도 항상 조심하고 어려움에 대해 겸손히 노력하면 헤쳐 나가겠지만 권세있고 부요한 상황이라도 오만하고 안일하면 망한다.

청조의 춤사위는 백성들의 고통과 애환을 담은 채 하느작 하느작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것은 <시경>의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눈에 익은 가락이었다. 이것은 나비의 한쪽 날개를 둘러 업은 채 사랑하는 이를 찾아 떠나고 싶은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장자(莊子)인가.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했다. 하루 전에 그를 찾아온 초(楚)나라 왕이 말했지 않은가.

“선생께서 정치를 맡아 주시오.”

전국시대 난세를 살았던 제왕의 청이었다. 그러나 어쨌던가.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날 욕 되게 하지 마시오. 차라리 더러운 개천에서 놀지언정 군왕에게 구속당하진 않을 것이오.”

장자와는 달리 재주있는 인사들은 제후에게 기용되길 바라며 천하를 돌아다녔잖은가. 그것을 과감히 털고 일어선 게 호접몽이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만질새라 온몸을 비늘가루로 덮고 곤봉처럼 생긴 더듬이 끝으로 활동하며 휴식할 때는 날개를 수직으로 접었다.

보통 춤사위는 선율의 막대기에 걸려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청조는 어디선가 들리던 풍요가 그쳤는데도 나비처럼 날개를 팔랑대며 춤을 추었다. 아직도 그녀의 호접몽은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황촉(黃燭)이 너울거렸다. 살그머니 엿보러 들어온 훈풍 때문은 아닌 것 같았으나 바람끝이 요사러워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길은 내리는 빗속에서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길이었다.

‘아.’

무언가 터져나올 것 같은 단발마의 신음이 입안에 갇히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람을 몰고 사내가 들어섰다. 후줄근히 젖은 사다함이었다. 그의 손엔 물이 오른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만든 풀피리가 들려 있었다. 눈치 빠른 시비(侍婢)는 주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향내음이 밴 수건을 가져와 낯선 방문객에게 내밀었다. 그것으로 물 먼지를 털어내고 치장이 잘 된 원탁으로 안내했다. 이런 일을 예견한 듯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는 미주(美酒)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 한 잔 받으시지요.”

한 잔 또 한 잔이 거듭되면서 두 사람의 낯은 벌겋게 익어갔다. 단숨에 들이키는 술이 아니었지만 청조의 주량은 여느 여인보다 센 편이었다. 할머니는 술을 가르치며 그런 말을 했었다.

“술은 물이다. 사내를 미치게 하려면 이것이 광음수(狂飮水)로 변해야 한다. 군왕이 허겁지겁 날뛰는 건 그걸 마셨기 때문이 아니더냐. 군왕의 몸 속엔 이미 미친 개 한 마리가 들어간 상태니 잡는 방법만 남았다.”

미쳤다는 건 군왕(王)이 개(犭)가 됐다는 것이다(狂). 미친 인간을 달래기 위해서는 필요한 걸 줘야 한다. 평생을 배 터져라 먹는 걸 과업으로 삼은 돼지에겐 그런 게 필요할지 모른다. 맹수는 허기지면 공격하는 발톱과 예리한 이빨로 상대를 찢어죽이는 버릇이 살아난다.

인간은 어떤가. 나이 열여섯의 사내에겐 달콤한 미주보다 뜨거운 열정이 필요했다. 청조는 상대의 숨결 속에서 갈망의 먹잇감을 찾아냈으나 입안에 갇힌 언어는 이상한 쪽으로 풀렸다.

“사다함 공, 비익조(比翼鳥)라는 새가 있답니다. 모양은 한쪽 뿐인 날개이기에 다른 쪽을 찾아야 날아오를 수 있답니다. 반쪽인 내가 날아오를 수 있도록 공께서 반쪽이 돼 주시겠어요.”

“그러지요.하늘에 오를 때는 반쪽뿐인 몸을 합할 수 있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어 사모하고 은애하는 정으로 꽁꽁 묶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빨려들듯한 자신의 심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청조는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각시인형을 사다함에게 내밀었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한 귀물은 아니었으나 대나무쪽에 풀을 붙인 각시인형은 사내의 얼굴을 요기롭게 노려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다함은 아뜩한 현기(眩氣)를 느꼈다. 무언가 강한 충동심이 일어났다. 분위기를 느낀 청조가 살그머니 안쪽으로 몸을 삐쳤으나 사다함의 움직임은 그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입술이 다가오고 옥죄이는 사슬처럼 듬직한 사내의 팔이 둥우리를 만들자 그녀는 어느새 스르르 녹아내렸다.

신라인들은 어릴 때부터 도검(刀劍)을 다룬 탓에 ‘궁시(宮矢)의 예’에 밝았다. 고구려 사람처럼 멀리 나가는 쇠뇌도 중요했지만 짧은 거리라도 노리는 과녁을 적중시키는 정확함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고운 꽃은 꺾지 않고 귀한 꽃은 소중히 다룬다는 걸 금언처럼 여겼다. 그것은 사다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라고 현소(玄素) 한 줄 안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객담을 즐기는 시러베 상놈들의 유연(遊宴)이라고 내팽개쳤다 적어도 사랑이란 하나 하나 진흙으로 새김질하듯 강약의 절도를 지키는 것이라 보았다.

▸미주(美酒) ; 좋은 술

▸현소(玄素) ; 현녀경과 소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