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명궁은 먼 곳에서 보면 조개의 입 벌린 모양이지만 이곳은 해(日)와 달(月)이 만나는(明) 특별한 장소였다. 그러했기에 안쪽과 앞쪽엔 각기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지소태후가 머무는 영명궁(永明宮)에 오르려면 좌측 길을 이용했고 정중앙은 대왕의 내전으로 향했으며 오른쪽은 태자가 머무는 월지궁(月支宮)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가하면 입벌린 조개 모양의 우측은 북문인 인화문 쪽으로 향했으며 좌측은 남문 귀정문 쪽이었다. 중앙의 길을 타고 오르면 내황전(內黃殿)이 있고 거기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한층 위세를 뽐내는 상태였다.

보명궁 중앙엔 두두룩히 흙이 쌓여 궁을 지을 때 자연스러운 점을 나타냈고 어느 곳은 인공적(人工的)으로 다듬어 산보(散步)를 겸한 등산로로 활용할 수 있게 하여 가장 위엔 누각을 지어 월산루(月山樓)란 편액을 붙였다.

낮잠에서 깨어난 청조(靑鳥)는 가볍게 양치하고 몸을 가다듬었다. 솜털이 가시지 않은 뾰얀 목덜미엔 양지옥(羊脂玉)처럼 엷기만 한 복숭아 색깔이 물들어 말갛게 부풀어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청조의 몸에 일곱 개의 구슬이 박혀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는 차암 특별한 아이다. 몸 안에 있는 일곱 개의 구슬이 기쁨과 환희를 줄 수도 있겠으나 슬픔과 고통으로 굴러가기도 할 것이다. 네 몸은 환희의 순간을 위해 몸 안에 흩어진 구슬들이 요동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너의 몸엔 구슬을 물어 나르는 새(鳥)가 숨어 있다. 그 새는 너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노래할 것이다. 할미 말처럼 그리 될 것이니 너의 짝을 만나기 전까진 청조(靑鳥)다.”

새는 어느 가지에나 앉을 수 있음을 은연 중 가르친 것이다. 옥진 할머니가 대왕을 만나 잠자리를 같이 하면 본래의 이름을 쓰라고 한 게 하루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얘기가 달라졌다. 그것이 색공의 혈통을 받은 자신의 운명인가. 이곳 보명궁은 타원형을 이룬 동산이다. 좌우로 나뉘어진 전각의 중앙엔 월산루(月山樓)란 누각이 있어 궁에 들어온 고관대작이나 그 부인들은 그곳에 올라 시회를 베푸는 게 예사로운 일이었다. 궁문을 지키는 귀당비장(貴幢裨將) 사다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궁시(弓矢) 겨루기에서 장원하자 지소태후로부터 신부감을 선물 받았다. 더구나 5세 풍월주 자리에 오르는 영예가 있었으니 그것을 천지의 신께 고하기 위해 어스름한 시각에 월산루 누각을 찾아온 것이다. 누군가 누각 안에 있다고 느꼈으나 궁안이란 점에 안심했는지 천천히 다가갔다.

“공(公)은 누구세요?”

그 바람에 놀란 것은 오히려 상대방이었다. 이제까지 보명궁에 머무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좌우를 지키는 봉사랑(奉事郞)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유령의 집을 지키는 애완견처럼 잔뜩 겁에 질린 낯이었다. 할일 없이 노닥거리는 자신들의 행동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곁을 스치는 것조차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지나치기 일색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무언가 신비롭고 상큼한 알갱이 하나가 톡 떨어져 자신에게 굴러오는 것 같았다. 얼얼한 감미로움에 망연히 서 있는데 그녀가 재우쳐 물었다.

“이곳은 이제 소녀의 장원(莊園)이에요. 공은 누구세요?”

“나는···, 난···, 사다함이오.”

그제야 얼굴을 빤히 들고 자세히 보았다. 나이 열여섯의 준수한 청년 사다함. 청조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비록 묻지 않았지만 사다함의 두 눈은 눈 앞에 있는 신묘한 소녀의 정체를 묻는 듯했다. 그녀는 말간 미소를 흩뿌리며 돌아섰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섶에 꽂은 흰 나비 모양의 장식 하나가 풀밭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것을 주어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는 그녀 모습은 저 만큼 아래 쪽의 와송(臥松) 곁은 스쳐가고 있었다. 이것이 사다함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가 듣기로 장차 자신의 짝이 될 아가씨는 미진부의 딸로 나이가 열 넷이라고 했다.

‘그래, 태후마마가 말씀하신 그 아가씨야!’

사다함이 기뻐한 것처럼 청조는 월성으로 들어오기 하루 전 천계(天癸)가 열리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할머니에게 들었던 방중서(房中書)의 구절들은 이젠 손 안에 들어 온 구름사탕이었다. 지금은 여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징후가 뚜렷이 드러난데다 할머니로부터 가계의 흐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우리 집안은 색공의 혈통이다. 궁에 들어간 이상 어떤 사내라도 잠자리를 할 수 있다. 더구나 너는 홍상미판(鴻上未判)이라는 열넷의 나이니 사내들이 눈빛을 빛내며 기회를 엿볼 시기다.”

색공의 첫 상대로 정한 사다함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었다. 이에 대해 얘기를 돌려보면 자못 흥미롭다. 비처왕은 21대 왕으로 소지왕(炤知王)으로도 불린다. <화랑세기(花郞世紀)>엔 그를 마복자(摩腹子)를 거느린 첫 번째 제왕으로 소개한다. 비처왕이 재위22년 9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인 날이(捺已)에 행차했을 때 그 마을에 사는 파로(波路)라는 이가 벽아(碧我)라는 딸을 수레에 싣고 명주로 덮은 채 왕에게 상납했다. 왕은 깜짝 놀랐다.

“너는 누구냐?”

“소녀의 아비는 파로이온데 대왕이 납시기를 기다려 저를 잠자리 시중으로 몰아넣었나이다.”

“어허, 이를 어쩐다. 나는 환궁 중이니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 내가 사람을 보낼 것이니 기다리거라.”

그러나 소지왕은 궁으로 돌아오던 길을 멈추고 파로의 집을 찾아갔다. 아리따운 자태가 마음을 어지럽혔으니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대왕이 자신의 집을 찾아든 것은 파로의 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날 이후 벽아를 궁으로 맞아들여 딸 하나를 낳았다. 이 아이가 비처왕비가 된 벽화부인이다.

처음에 비량공(比梁公)이 비처왕의 왕비 벽화후(碧花后)를 은애하여 그녀가 뒷간에 갈 때엔 항상 그곳까지 좇아갔다. 법흥왕과 비량공은 남색을 즐기는 사이였으므로 이를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태어난 아이가 사다함의 부친 구리지였다.

구리지는 아름답기가 여자 못지 않았고 담력도 좋았다. 점점 자라서는 낭도와 무예를 좋아했는데 위화랑의 딸 금진낭주와 정을 통해 토함 · 색달 ·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12세가 되었을 무렵 낭도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검술에도 능했다.

개국(開國) 11년(진흥왕 22년) 벽화후가 세상을 떠나자 도설지(道設智)가 가야국 딸을 왕후로 삼게 한 뒤 땅을 다투었는데 이때 무리들이 나아오자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진압케 했다. 사다함은 선봉이 되길 청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지 않자 그는 낭도들을 사사로이 이끌고 나가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러한 공로로 5세 풍월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의 나이 열여섯 때였다.

▸봉사랑(奉事郞) ;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임무를 수행하는 화랑

▸구리지(仇利知) ; 구린네나는 사람

▸마복자(摩腹子) ; 다른 사람의 부인이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랑해주다 태어난 아이를 보살펴주는 대신 복종하게 하는 독특한 입양 제도

▸도설지(道設智) ; <동사강목>엔 대가야국 16대 도설지왕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