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한 웃음이 입가에 어리고 두 눈엔 붉은 빛이 너울거렸다.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이 역력한 낯빛이었다. 시합개시를 알리는 가로(家老)의 선언과 함께 돌을 가려 백번(白番)이 된 웅인이 흑의 착수를 가려 착점했다.

열 수 가까이 진행된 포석에서 웅인은 쉬이 착점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포석배치는 웅인이 어느 정도 뒤떨어진 감이 있을 정도여서 아마도 뒤떨어진 포석 치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한동안의 침묵에서 깨어난 웅인은 자신의 백세를 크게 활용하는 3연성의 중앙에 한 점을 놓지 않고 적진 깊숙이 침입했다. 조신의 아들 길구(吉久)는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크게 씌워나갔다. 그런데도 웅인은 상대의 추궁엔 아랑곳없이 3연성의 남아있는 곳에 착점했다.

길구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씌운 자리에서 중앙으로 눈목(目) 자로 뛰어나갔다. 그래도  그곳을 버려둔 채 변을 확보하자 길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한동안 백돌을 노려보더니 날일(日)자로 급소에 일격을 가했다. 만약 이 한 점이 흑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흑세는 집으로 굳어져 70집은 충분했다.

웅인이 한 차례 손을 뺄 때 낙석자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가 싶었다. 그런데 두 번째도 손을 빼자 하얗게 질려버렸다. 길구가 세 번째 착점을 하며 잡으로 오자 웅인은 한동안 노려보다 백 한 점을 움직였다.

끊고 젖히고 뻗고 조이는 중에 수상전이 벌어졌다. 20알이 넘는 백이 아무런 대가없이 죽는다면 바둑은 여기에서 끝이었다. 비록 상변에 세를 부풀려놓았지만 양쪽을 한꺼번에 둘 수 없는 이상 한쪽은 희생양이 될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해 보였다.

수상전에 들어가면서 길구는 몇 번이고 수를 읽어보았지만 자신이 한 수 빨라 즐거운 마음으로 수를 조여 나갔다. 웅인은 하단부와 좌우를 단수치고 중앙을 뚫었다. 어찌 보면 자충수나 진배없는, 자신의 수를 스스로 메워나가는 듯 보였다. 다시 그곳에서 끊고, 뻗고, 느는 중에 흑 한 점을 축으로 몰았다.

낙석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슨 수가 있는 듯했다. 허나 아무리 봐도 그것은 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웅인은 한 점을 축으로 몰았다. 일곱 수 가까이 몰다가 장문을 씌웠다. 백의 약점이 두 곳이나 생겨났다. 길구가 양단수를 치자 웅인은 뒤에서부터 조이더니 다시 축으로 몰았다.

흑말은 안개 속을 헤엄치는 용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축으로 몰고 장문 치자 한 수 두 수 늘어진 축이 됐는가 했더니 웅인은 그곳에서 손을 빼 위쪽에 철주(鐵柱)를 박듯 귀에 쌍립으로 늘어섰다. 집은 10여 집이나 부족했다.

이렇다보니 길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느 한 곳 잘못 둔 곳이 없이 포석을 하고 눈에 빤히 보이는 것처럼 축으로 몰고 중앙을 키우면 상당히 집을 마련하리란 것은 고수들의 수읽기에도 나와 있는 수순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이토록 황당하게 10여집이나 부족하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토록 기묘한 싸바르기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낙석자는 중앙 쪽에 집이 많이 생길 것 같아 바둑은 이제부터라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 길구가 고갤 숙이며 돌을 던진 것이다.

“더 이상 해볼 곳이 없습니다. 선생은 참으로 바둑의 달인이십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소생은 운이 좋았습니다.”

잠시 후 복기가 시작되었다. 10여 수를 놓아가다 웅인은 자신의 말을 잡으러 온 흑 한점을 패착이라고 지적했다. 그 점으로 인해 두 수를 더 놓아야 했고 자신이 큰 곳에 선점하여 이미 바둑은 여기에서 끝났다고 했다. 좌중은 깜짝 놀랐다.

“중앙으로 뚫고 나가는 수를 방비하기 위해 두 수 이상이 소모되는 것이니···, 그리되면 수상전은 소생이 오히려 한 수 이상 빠르게 됩니다.”

말을 듣고 보니 흑진에 침입해 온 백을 씌운 수가 크게 잘못된 한 수였다.

“그렇다면 씌운 수가 잘못된 숩니까?”

“그 수가 나쁠 건 없으나 시기상조라고 보여집니다.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헤어져 돌아온 후 웅인은 직리자와 혼례를 올렸다. 재행차 낙석자의 집에 며칠을 지내고 오니 낡은 서랍에 넣어둔 [위기도(僞棋圖)]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책을 찾는데 자신과 바둑을 둔 길구가 갑자기 급사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욱 놀랄 일은 자신의 친구 소전(小田)이 조신이라는 자의 집에 갇혀 곤죽이 되도록 매를 맞고 풀려났다는 소문이 들었다. 병문안을 가자 소전은,

“자네 볼 면복이 없네.”

멈칫거리며 그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길구가 시합에서 패하자 그는 통인(通人)을 놓아 대국을 한 상대의 기력이 높아진 이유를 캐고 들었다. 소전 역시 자기보다 기력이 약한 웅인이 그렇듯 향상된 기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떤 연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혼인으로 어수선한 틈을 노려 집안을 뒤져 [위기도(僞棋圖)]를 찾아내 길구에게 전한 것이다. 그 책을 몇 페이지 넘기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말에 웅인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을 준 노승의 말처럼 자신에게 닥친 업(業)을 상대가 대신 받았다는 생각에 나직히 불호를 읊조린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

얘기를 마친 금련(金蓮)이 가만이 시문을 중얼거렸다.

山下寒煙積

橫飛宮樹邊

風吹自不定

斜日滿蒼天

산 아래 찬 연기 싸여 돌다가

수성궁 나무 옆을 빗겨 나르네

바람 따라 이리 저리 정한 길 없어

저녁 놀 온 하늘에 날아 퍼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