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댁에서 소녀의 집으로 청혼해 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여러 생각을 하시다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조건이란 게 무엇입니까?”

“소녀를 그 댁으로 출가시킬 마음이 전혀 없는 탓에···, 아버님께서는 이쪽에서 보아둔 사윗감과 내기바둑을 두어 이긴다면 청혼을 허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객청에는 근동에서 바둑깨나 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집의 대표기사로 선발되기 위해 용호(龍虎)의 교쟁(交爭)을 다투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합 일정이 10일 남았다고 말하는 직리자의 표정은 바둑을 둘 줄 안다면 어서 객청으로 나가 이 댁의 대표기사를 뽑는 시기(試棋)에 참석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사나운 빗발을 무릅쓰고 그녀가 산사로 올라가 부처님께 발원한 일도 모두 이 일과 무관하지 않는 것 같아, 잠시 생각을 한 웅인이 짧게 말했다.

“바둑 대회에 나가겠습니다.”

일단 집으로 돌아온 웅인은 노승이 주고 간 [위기도(圍棋圖)]를 꺼내들었다. 비록 동네바둑의 고수라지만 그는 이 책을 보면서 실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략 60여 장의 갈포지(葛布紙)에 붓으로 그려진 바둑 모형은 실전에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평소엔 흔연스럽게 넘겼던 행마와 사활의 묘수들이 진흙속의 진주처럼 알알이 박혀 있었다. 거기에는 바둑 한 판을 축으로 몰아가는 회돌이 묘수가 숨어 있는가 하면, 용호(龍虎)처럼 끊고 뻗는 기세에서 대마의 목줄기를 쪼아대는 독수리의 부리같은 사나운 수도 숨어 있었다.

전반부는 한 수로 응수 타진했다가 그 수에 걸려들면 몰판을 유도하는 함정수가 도사리고 있었고, 후반부는 그런 수들을 파해하는 도식(圖式)이 넉넉히 그려져 있었다.

머리 좋은 웅인은 도형을 모두 외어버리고 나서 바둑판을 당겨 한 도형씩 놓아가며 응용해 보았다. 그러는 중에 닷새가 훌쩍 지나갔다. 장마가 갠 하늘을 올려다보다 웅인은 바둑대회가 열리고 있는 직리자의 집으로 향했다. 비록 늦게 참가하였지만 직리자가 그 부친에게 귀띔해 주어서인지 웅인은 일곱 명이 벌이는 최종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고약한 일은 죽마고우인 소전(小田)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얼굴을 맞대면한 탓에 몹시 놀랐으나 이내 서로의 손을 정겹게 잡으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최선을 다해 보세.”

소전(小田)이 웃으며 말했다. 평소 두 사람의 바둑에서 승률은 항상 소전이 앞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전은 최후에 웅인과 결승을 벌인다 해도 자신이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호쾌한 기풍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반면 웅인은 위태위태하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결승에서 맞붙었다. 소전은 평소대로 자신이 잘 쓰던 암수를 던지며 웅인을 유혹했다. 웅인이 자신의 함정수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 곳에서 수읽기 싸움이 벌어져 웅인의 대마는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다. 자신의 승리를 믿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웬걸 웅인이 좌우를 아래쪽에서 단수치지 않고 자신의 중앙말(中央馬)을 빈삼각의 우형으로 이어놓았다.

이 한 수가 묘수였다. 이 수로 인해 수 싸움은 소전이 두 수나 불리해 중앙말이 살아나면서 아래쪽에 있는 소전의 대마는 자동으로 급사한 것이다.

“졌네. 자네 기력이 며칠 사이에 이토록 강해졌는가?”

웅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자네가 양보해 주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웃고 있었지만 소전의 눈꼬리가 심상치 않게 파들거리는 것은 아마도 기력이 세어진 점에 대한 투기였을 것이다. 출석자는 위기대회에서 승리한 웅인을 안채로 불러들여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딸 아이의 말에 기력이 출중하다 하였는데 과연 틀림없구만. 이틀 후 가로(家老)들이 모이는 곳에 나아가 내 딸 아이의 평생을 건 내기바둑을 조신의 아들과 두어주게. 그렇게 하자면 자네 집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나와 일찍 떠나세.”

웅인은 그날 밤을 지내고 다음날 가로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는 정오가 가까워올 무렵이었다. 차 한 잔을 하고 시합 장소로 들어가자 좌우에 여섯 명의 노인이 앉고 중앙엔 적실수(赤實樹)로 만든 바둑판이 놓여 있었는데 가장 위쪽에 치렁한 윗옷을 걸친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웅인이 바둑판 앞에 앉자 젊은이는 두 눈을 번쩍 뜨고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