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은 지리산에 도착하여 촘촘한 돌 숲을 요리뱅글 저리 뱅글 돌아 청학동에 올랐다. 한자락 구름이 잠겨드는 거암 위에 바둑 두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사람은 빡빡 깎은 머리에 가사 장삼을 걸쳤고, 또 한 사람은 선비풍에 쌍학선(雙鶴扇)을 들고 장고에 빠진 노승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보시오 검단선사(黔丹禪師), 이 판은 자네가 졌네 그려.”
“무슨 소릴! 이보시오, 고운. 어찌하여 나의 묘수를 잊고 있었는가.”
노승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지만 눈가엔 고뇌의 빛이 역력했다. 하인이 앞으로 나가 공손히 절을 하고 편지를 올리니 선비풍의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네가 올 줄 알았다.”
이상한 것은 기국암(棋局岩)의 돌 바둑 위에 펼쳐진 것은 선은이 보내 바로 그 도형이었다.
모양이 좁은 곳에서 사는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 그저 신묘하게 느껴지게 한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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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기에도 궁도가 좁다. 만약 백이 1로 둔다면 흑2로 그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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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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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1로 궁도를 넓히면?
흑2로 치중한다. 백3으로 받을 수밖에 없고, 흑4, 백5로 따낼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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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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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백을 잡으려면 흑6에 먹여쳐야 하는데-, 이 수로 백을 잡은 듯 보인다.
그런데 백에겐 7로 가만히 잇는 묘수가 있다. 백9로 되따내는 후절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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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도2-1> |
선비는 두고 있던 바둑을 끝내고 회답의 편지와 함께 청옥(靑玉)의 바둑돌을 내어 주었다. 하인은 머리 숙여 배례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산에 오를 때에는 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온 산에 가득한 가을철이었는데 내려오는 길엔 발 아래 풀포기에서 새싹이 움트는 봄이었다.
‘그것참 이상하다. 내가 산에 있었던 것은 두어 시각뿐이었는데.'
남추는 하인이 가져온 청옥의 바둑알을 무척 아끼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바둑돌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바둑을 두었던 두 사람은 신라시대 대문장인 최치원과 이승 검단선사였다고 전한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다. 수려한 경계는 선경을 방불케 하고 선록(仙綠) 깃든 녹음 속에 한 점 바둑알을 힘차게 놓으며 고운은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허허허 검단선사! 후절수를 착각했네 그려.”
얘기를 마친 소옥이 붓을 들어 단숨에 시 한편을 일필휘지했다. 시제(詩題)는 ‘연기(煙氣)'였다.
綠煙細如織
隨風半入門
作微深復淺
不覺近黃昏
가늘은 푸른 연기 베를 짠 듯이
반이나 바람 따라 문에 드누나
엷은 듯 짙은 듯 아른거리니
황혼이 가까운 줄 미처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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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강
노을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