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십면매복(十面埋伏)의 수

왜 이런 글이 날아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어난 사건에 대해 누군가 자문을 구한 것이라면 응달에 몸을 감춘 채 이런 모험을 하는 게 아닐 것이고, 일어날 일에 대한 처신이라면 상당한 모험일 수 있었다.

무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지닌 기록을 뭉텅 그려 육도 선생에게 전해올 배짱이라면 아무래도 장차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시일 수 있었다. 무슨 이유로 하필이면 ‘오로관’의 육도 선생인가. 문제는 그 점이었다.

<내가 이런 글을 보낸 것은 두 번째네. 경위원에 몸담은 별순검에게 경고 차원에서 보냈지만 그들은 내가 무엇을 원하며 누구를 죽일지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봄날에 낮잠 즐기는 꿈을 꾸고 있더구만. 나는 그게 안타까울 뿐이네. 육도 선생께서 나의 의도를 풀어 ‘십면매복(十面埋伏)의 수’를 찾아낸다면 애꿎은 목숨 하나 살릴 수 있을 것이오.>

내용은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또 하나의 봉투엔 열 편의 시가 들어있었다. 잠시 시구들을 들여다보고 나서 육도 선생의 상상은 먼 과거로 되돌아갔다.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이 데리고 있던 열 명의 궁녀, 이른바 십궁희(十宮姬)들이 남긴 싯귀였다.

그는 1429년에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왕자들과 함경도에 설치된 육진(六鎭)에 나가 변방의 임무를 맡으며 야인을 토벌한 공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정계에 떠오른 것은 1450년 문종이 즉위한 후 황표정치(黃票政治)를 시행하면서였다. 이것은 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제도로,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김종서 · 황보인 등의 세력과 규합하여 수양대군과 세력을 다투었다.

겉으로는 정치에 뛰어들었으나 그 속내는 어려서부터 좋아한 학문에 심취돼 있었다. 그가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의 손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의 기개가 한 겨울에 우뚝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마냥 고절한 것을 보면 그를 일러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을 써도 무방할 듯 보인다.

안평대군을 ‘삼절’이라 부르는 것은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거문고에도 능했고,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글 잘하는 문사들을 초빙해 연회를 베풀고 자신이 모은 서화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등 문화계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그의 글씨는 고려 말부터 유행하던 조맹부(趙孟頫) 체를 따랐으나 그것을 조선의 필체로 탈바꿈시켜 오히려 조맹부 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중국 사신들에게 받을 정도였다.

꿈에 본 광경을 당대 제일의 화가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완성된 그림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발문을 쓰고 여러 학자들에게 글을 짓게 해 시화첩을 만든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그가 ‘열 명의 궁녀(十宮姬)’들을 휘하에 들인 것은 1452년, 단종이 보위에 오른 지 두 해가 되는 때였다.

이날 안평대군은 사저를 찾아온 성삼문(成三問)에게 당나라 문인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을 읊조리며 평을 바라고 있었다.

산은 높은 데 있는 게 아니고

신선이 있으면 유명하고

물은 깊음에 있지 않으니

용이 있으면 신령하다

보잘 것 없는 나의 작은 집이나

다만 나의 덕이 향기롭다

태흔은 층계에 올라 푸르고

초색은 발에 비쳐들어 파랗구나

안평대군은 지그시 감은 눈을 뜨며 ‘어떤가?’ 반문하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공은 시안이 높으니 이 시를 평해 주게.”

성삼문은 기반(棋盤)에 놓여있는 바둑알을 천천히 통 안에 집어넣는 안평대군을 보며 말했다.

“유우석은 ‘누실명’에서 자기의 방이 비록 초라할지라도 하남성 남양에 있는 제갈공명의 초려(草廬)나 촉의 서쪽 사천성 성도에 있던 한나라 시대 양자운(楊子雲)의 정자 등에 비길만하다고 은근히 자랑하고 있어요. 공자님 말씀처럼 군자가 그 나라에 있으면 오랑캐 땅이라도 더럽지 않지요.”

“허허허.”

안평대군은 창밖 멀리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이보시오 근보(謹甫 ; 성삼문의 별호), 공과 바둑을 두었더니 몽득(夢得 ; 유우석의 字)의 ‘관기가(觀棋歌)’가 떠오릅니다.”

初疑磊落曉天星

次見搏擊三秋兵

雁行布陣衆未曉

虎冗得子人皆驚

처음엔 엉성하여 새벽별처럼 드물다가도

어느새 치고 때리고 가을바람의 몰아침일세

기러기 줄 지어 진 친 뜻을 누가 알 수 있으리

호랑이 굴에 들어가 적을 잡으니 놀라지 않으랴

안평대군이 소리 없이 환하게 웃었다.

“어떻습니까, 공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대군.”

“얘기에 능숙한, 바둑 잘 두는 시를 짓는 궁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