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유록]의 기록엔 교묘하게 신도교의 등장을 나타내고 있었어요. 그것이 교묘하다고 느낀 것은 단 한 줄씩이라도 우리의 민족 종교나 선도, 또는 기독교 등을 믹서한 상태에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 치도 어긋남 없는 기록들을 검토해 나가면 기이하게도 우리의 근대사를 옮겨놓은 게 분명하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격암유록]은 예언서가 아닌 기록 문학이란 의혹이지요.”

“흐음, 그래서?”

“또한 그 책은 최근까지 다룬 흔적이 보입니다.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문구도 등장하죠. 비행기라든가 기차에 대한 설명도 들쑥날쑥이구요. 그렇다 해도 [격암유록]이란 예언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만인을 상대로 지혜를 겨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자면 당연히….”

“당연히?”

“요란스러운 등장보다 조용한 쪽을 택했겠죠. 직접 설명하기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것은 결과가 똑같은 파자점의 괘사라고나 할까요.”

노인은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대더니 눈빛을 사납게 빛냈다. 그는 탁원제 쪽에 흘낏 눈길을 주고 나서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예전부터 귀암이라는 늙은이의 점법이 두려웠어. 그 자의 몸에 소옹의 [황극책수(皇極策數)]가 없었던들 영원히 그 영감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을 거야. 참으로 묘한 일, 어찌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소강절은 이렇듯 신묘한 점법을 만들었을까.’

노인은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놀라워했다. 아무리 같은 점법을 익혔다 해도 괘사가 함께 떨어지는 경우는 희귀했다. 분명 신새벽에 낯선 무리가 역경원에 온다는 ‘원(元)’이라는 괘사를 얻었다. 그 다음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을까를 여러모로 살폈지만 점괘엔 특별한 게 없었다.

“흐음, 귀암이 기다리는 건 두 사람이 아니었네. 그렇게 보면 방녀는 곁가지로구먼.”

김순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핏기가 가신 낯으로 탁원제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바로잡았다.

“귀암…선생님이 아니신가요?”

“만나게 해주지.”

두어 번 손뼉을 치자 묘화라는 여인이 다가와 휠체어를 밀었다. 일행들이 송호정을 내려와 집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가로지르자 목조로 된 별채가 나타났다. 휠체어는 통로를 지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가장 끝 방에 이르렀을 때에야 묘화는 휠체어를 세우고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호피가 덧씌운 보료가 깔려있고 그 위에 신선 같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허허허, 귀암을 찾아온 손님이 있을 거라더니 정말이구만.”

휠체어에 탄 노인은 탁원제를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문을 닫아버렸다. 김순옥은 출입이 통제된 것이다.

“어르신!”

탁원제가 가까이 오려는 것을 노인은 한손을 들어 저지했다.

“가만있게. 내가 정신이 없어. 흐음, 아직도 학수가 나를 잊지 않고 있다구?”

“아, 예에.”

“하면, 신표를 주었겠지?”

‘신표?’

자문하며 탁원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황급히 속주머니에서 청사가 그려진 빨간 딱지를 꺼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상대에 대한 안도감을 갖는 몸짓이었다. 노인은 빨간 딱지를 받아 이리저리 매만지다 돌려주었다.

“조금 전에 만났던 이가 고암(孤岩)이야. 한학에 조예가 깊은데다 한땐 악필로 문명을 떨쳤지. 특히 측자 · 파자라면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어. 허허허, 그러고 보니 50여년 전의 얘기를 하고 있구만 그래.”

“어르신께선 왜 이곳에 계십니까?”

“연유가 있네.”

“신도교에 몸담은 지 오래되셨습니까?”

“지금 와 그런 얘기가 무슨 소용 있는가. 모두 부질없는 옛 얘기지. 가만,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 얘긴 하고 넘어가야겠구먼.”

“?….”

“자네 관상은 한 번 홍역을 치르겠어. 그런 말이 있잖은가. 북이란 크게 치면 소리 역시 큰 법이라고. 장마가 지면 골이 깊어져 급류가 생기네. 눈앞에 닥친 고비를 잘 넘겨야 큰 뜻을 이룰 게야. 아시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