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만약을 위한 사도왕후의 조치였다. 당시 월성에 떠다니는 소문은 세종 전군을 가엽게 여기는 추세였다. 어머니는 신라의 가장 어른인 태후시지만 지금까지의 치정(治政)으로 인한 여러 폐단으로 곁가지 아들인 세종 전군이 홀대 받는 걸 떠나 어쩌면 제거대상이 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에 있을 때나 사가인 인왕동에 있을 때도 늘 중원과 삼한의 해묵은 서책을 가까이 한 점은 많은 사람의 동정을 자아냈다.

“전군은 왕실 사람이라기보다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어야 했어. 누구나 권세와 명예에 깊이 빠져들기 마련이지만 그 분은 이 나라의 왕위도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태후마마와 싸웠다지 않은가. 우리 신라에 그런 분이 계시다는 걸 다행스럽게 여기네.”

이런 사람에게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약점이 되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도리임을 알고 있었기에 세종 전군을 잡으러 어사대 관병들이 출발했다는 소문이 떠돌자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세종 전군의 맑은 정신세계를 옹호하고 나섰다.

“열길 물속을 알 듯, 세종 전군의 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니 우리네 백성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 분은 권좌엔 욕심이 없고 학문 연구에 관심이 있어. 그런 분을 진흙구덩이에 몰아붙인다면 아무리 깨끗한 자도 터럭 먼지가 묻을 게 아닌가.”

지소태후가 세력을 잃자 모든 관심이 세종 전군에게 쏟아진 것을 양위마마는 모를 리 없었다. 그의 맑은 심성을 아꼈던 탓에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협상의 비결’을 생각했지 않은가.

사도왕후가 자기 쪽으로 사사를 끌어들이려는 건 몇 가지 이유 중에 세종 전군이 포함돼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전개 되더라도 그만은 살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월성의 슬픈 소식을 들었는지 세종 전군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들러 태자의 주검이 있다는 어사대를 찾아갔다.

“이보게들, 태자마마의 주검이 어딨는가. 개에게 물려 돌아가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전군마마, 진정하십시오. 태자마마께선 대왕마마의 명으로 가매장(假埋葬)한 지 반나절이 지났나이다. 판관 어른이 자릴 비웠사오니 잠시 기다리시지요.”

“양위마마의 상심은 어느 정도신가. 식음을 전폐하셨는가?”

“소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옵니다.”

그때 문밖이 다소 소란스러워지며 어사대 판관이 나타났다. 설추경은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나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자세를 잡았다.

“오늘의 취조는 전군마마의 행적을 묻는 단순한 게 아닙니다. 들으신 것처럼 태자마마가 개에게 물려 비명에 횡사하시고 월성은 구구한 소문이 떠다니는 바람에 어수선한 상황입니다. 전군마마, 소인은 대왕의 명을 받들어 이번 일에 의심이 가는 사람을 취조하고 있으니 다소 서운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결례가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해량(海諒)해 주시옵소서.”

“내 판관의 마음을 알았으니 무엇이건 의심이 가는 건 물어 보시오. 성심껏 답하리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것을 근거로 묻습니다. 대왕께서 남도의 연회를 다녀오신 후 미실 낭주에게 새주(璽主)를 내리시고 화랑을 통솔할 수 있는 원화(源花)에 임명했습니다. 이 점 아시고 계시지요?”

“그렇소.”

“원화가 된다는 건 화랑의 전군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아무리 대왕께서 내리셨다지만 그건 전군마마를 위협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소.”

설추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느릿하게 서성이며 이따금 불자(拂子)로 가만히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 행동은 상대를 몰아치기 전의 버룻이라는 걸 알기에 어사대 관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시 그런 말이 떨어졌다.

“풍류주가 된다는 것은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군병을 움직일 권한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일종의 병권(兵權)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소.”

“대왕께서 미실 낭주를 원화로 삼았다면, 이것은 전군마마께 내린 풍류주의 권한을 회수하고 그것을 미실 낭주에게 주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소.”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군마마가 풍류주에 오른 건 고작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빼앗는 건 원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판관의 얘긴 그런 것이오? 나의 권한을 미실에게 빼앗겼으니 당연히 억화심정이 있을 것이고, 그로인해 미실을 죽이려 했다는 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 태자가 죽었소?”

“과녁이 달랐다는 얘깁니다. 미실 낭주를 죽이려 계획을 세웠지만 정황을 모른 태자가 보명궁 담을 넘다 개에게 물려죽었습니다. 그런 결론을 아시기에 서둘러 월성을 떠난 게 아닙니까?”

▲불자(拂子) ; 중간 간부들이 인원을 통솔하거나 작전 계획을 짤 때 지시용으로 가지고 있던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