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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바둑- 쓸모없음과 쓸모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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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바둑- 쓸모없음과 쓸모있음
2002-05-06 조회 10369    프린트스크랩

- 장자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위해 한 주막에 들었는데 주막옆의 나무가 참 커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보기에도 좋았다. 장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저 나무는 쓸모가 없었기에 저렇게 클 수 있었다. 저 나무보다 쓸모가 많고 가치 있었던 것들은, 이미 크기전에 사람들에 의해 베어져 여러 용도로 쓰여 졌을 것이다. 저 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보잘 것 없었기에 저렇게 큰 나무로 자라나 많은 사람에게 유용함을 주고 있다' - 즉 장자는 쓸 모 없는 것의 쓸 모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왼쪽의 이미지가 우리가 이름 석자는 흔히 들어 보았을 다산 정약용의 초상이다. ]





[정약용의 實事求是]그가 젊었을 때, 그는 바둑을 쓸모없다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수원성(華城)은 서양의 축성기술과 조선시대의 축성기술을 아우른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꼭 우리것이라 무조건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축조 당시의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일관된 체계와 설계하에서 성을 쌓아, 성이 훼손된 뒤라 하더라도 설계도면에 의해 정확히 원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과학성과 합리성, 동,서양의 기술을 혼합하면서 나오게 된 건축물의 미적인 부분등이 그러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되는 부분이라고 한다.

수원성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비록 그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다산(茶山) 정약용이며.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올려 수원성의 축조에 큰 기여를 했고,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뛰어난 실학자로 목민심서등의 걸작을 쓴 것을 알고 있다.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던 다산은 학문적인 개방성이 비교적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학의 선구자 이익의 실학사상에 감동했으며,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이 들여온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보여 천주교의 세례까지 받게 된것만 보아도 학문적인 진실성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것,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 한마디로 세상살이에 쓸모있는 것에 대한 진리탐구를 최선으로 여기고 많은 세상 사람들을 최대한 부유하게 해주는 실학특유의 공리주의적인 정치적인 이상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잘나가며, 수원성 축조에 한 몫 거들때 다산의 바둑에 대한 감정은 썩 좋지 않았다. 분명 바둑은 기본적으로 다른 어떤 활동과는 틀리게 생산에는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없는 놀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젊고 패기있으며 정치적, 학문적 이상이 드높았던, 말 그대로의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빠져있던 다산은 바둑에 대해 이런시도 남겼다. 바둑을 즐겨하는 사람은 자기 주위의 대단히 성실하고 능력있고 인정받는 사람이, 바둑에 대해 이런식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

바둑에 대한 그의 한시를 살펴볼 것 같으면

바둑은 내 아직 지고 이기는 것 모르네,
옆에서 보기만 하자니 어리석은 사람같구나.
내게 여의철(如意鐵) 한가지가 있기만 하다면
홱 한번 휘둘러서 다 쓸어 버리고 싶네.
(譯 이승우의 바둑이야기)

바둑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아주 쓸데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바둑의 유용성을 설득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며, 부질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실제 사회생활도 아주 건실하며 신뢰받고 있는 분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쓸모있다는 것은 결국 쓸모가 없다는 것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쓸모없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쓸모 있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쓸모 있음의 존재가치가 아주 떨어질 것이다.

정약용의 실사구시에 대한 강직한 가치관은 이후 자신이 정치적으로 쓸모없고 박해받는 존재가 되면서 현격히 바뀌게 된다.


[여유당(與猶堂)의 의미] 쓸 모 있음과 쓸 모 없음의 아이러니.

다음은 다산의 관료 경력이다.

다산은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27세때인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정조의 총해로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에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empas 백과사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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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에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했는데, 관료생활 자체는 굴곡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중앙의 요직을 다니면서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고 보인다. 다산이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과 학문을 아끼고 사랑했던 최대의 정치적 배경인 정조대왕이 있었기 때문인데. 정조가 세상을 떠난 순조1년(1801년) 다산의 정치역정은 완전히 끝장난다. 비어로 표현하자면 순식간에 '떨어지는 똥'의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 맞겠다.

젊은 시절의 천주교 입문이 또 반대 당파(노론 벽파)의 표적이 되고 만 것인데 정조와 같은 강력한 끈이 없어진 다산의 가문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다산을 포함한 삼형제가 처벌을 받는데 첫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죽었으며. 다산또한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강진으로 유배되어 다시는 정치길에 나설 수 없었다.[신유교난(辛酉敎難)=신유박해)] 그가 유배된 기간은 18년이다.

하지만 그가 정치적으로 쓸모없어 졌을 때, 오히려 그의 학문적 업적이 완성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그가 반대파로부터 정치적인 굴욕과 인간 존엄성의 훼손을 심하게 겪으면서, 비로서 민중들에 대한 시각도 더욱 진지하게 되었고, 유배생활동안 많은 시간을 실학을 집대성하는데 바칠 수 있게 된 때문이다. 즉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에서 비로소 피지배 계층의 비참한 삶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실학사상에 보태어 노비제 폐기. 경제적인 분배의 정의, 새로운 기술의 도입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근대적인 실학체계를 유배기간중 세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호에 다음과 같은 당호가 추가되었다. 여유당(與猶堂)
뜻은 여유를 부리며 유유 자적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상당히 보신 주의적인 처세와 의심으로 가득착 노회한 늙은이와 같은 말씀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지부동과 일정부분(?) 통하는 바가 있다. 여유당의 여유를 자세히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말로

與兮若冬涉川(여혜약동섭천)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의 앞자를 딴 것이다, 간략하게 의역하면 "겨울철에 살짝 언 시냇물을 건널때처럼 조심하고, 사방에 사람이 지켜보고 있을 때 처럼 항상 유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시절의 다산의 실천정신과는 무엇인가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바둑에 대한 다산의 평가에서도 어느정도 나타난다. 다소 과장하자면.. 마침내 다산이 유배를 받고 핍박에 빠지고, 자신이 자신의 환경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자 쓸모없는 것의 쓸모없는 것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볼 수 도 있겟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목민심서를 보면, 책의 형전육조(刑典六條)편에서 '노름판을 적발할 경우 재물을 압수할 것은 물론 형장 80대를 때려야 한다'고 젊을 때와 비슷한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다소 과격한 의지를 드러내지만. 오직 바둑에 있어서만은 특별히 예외를 두었다 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오직 바둑만은 천한 자들이 하는 놀이가 아니니 분별해야 한다.' 젊은 시절 판을 쓸어버리겠다는 한시와는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분명 다산이 젊은 시절 쓸모없게 여긴 바둑을 아주 즐긴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또한 말년에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한가지 방법으로 '깨끗한 대자리에서 바둑을 두는 것을 꼽았던 것' 도 달라진 다산의 처세관이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을 것 이다.

[다산 정약용 가치관 변화와 IDEA Review ]
왕의 총애를 받던 한창 젊은 시절의 다산은, 잘나가는 관료로서 바둑과 같은 쓸모없음에 눈길을 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인생을 쓸모있는 바람직한 가치로만 채워 살 수 있을 까? 항상 인류에게 이익이 될만한 아주 가치있는 것, 생산기술에 도움이 되는 그러한 것들만으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면 정말이지 사는 재미가 너무 없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그것을 깨닫는 데는 일련의 작용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중앙 정치의 핵심인 조정에서 박해받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는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때 부터 바둑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하면서, 쓸모없는 바둑의 쓸모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세상의 쓸모있는 것들은 쓸모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쓸모있음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이고 때로는 쓸모없음이 더욱 큰 쓸모있음을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쓸모없는 쇠락한 정치인이 되었을 때, 한국역사를 통털어 손에 꼽히는 학문적인 위업을 달성한 역사적인 (아주 쓸모있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여유와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인생과 업적도 새로 태어난 것이다.

바둑도 마찬가지, 쓸모없는 것이 때로는 너무나 쓸모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하기에 5000년이 넘게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바둑이 아주 기본적으로 쓸모있는 것이었으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했을 수도 있다.

인생이 쓸모있는 것으로 구성될 수만은 없다. 항상 무엇인가 가치추구를 위해 바쁘다면 가끔씩은 쓸모없는, 그러나 천하지 않은, 바둑을 즐겨보고 인정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바로 위대한 학자 정약용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 Badukdol / drago@baduk.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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