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와 조치훈의 입계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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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와 조치훈의 입계의완
2009-12-03 조회 13460    프린트스크랩

 

입계의완(入堺宜緩)

상대방 경계(세력 또는 진영)에 들어갈 때는 완만하게 삭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진에 깊숙이 쳐들어가 헤집고 다니며 상대를 완전히 농락하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런데 왜 완만하게 삭감하라고 하는 것일까?

 


[제11회 농심배 1라운드 2국]

● 딩웨이 9단 ○ 김지석 6단

황제 조훈현 9단이 기재를 인정한 김지석 프로가 농심배 첫판을 승리하고 두 번째 판에서 딩웨이 프로와 마주 앉았다.

딩웨이 9단이 흑▲로 한껏 폼을 넓힌 장면

다음 백의 삭감은 어디가 적정선일까?

 

 

 

 

 

이곳까지 침입하는 것은?

 

 

 

 

 

 

 

백▲는 깊은 느낌이 든다. 당장 흑A로 공격당할 것이다. 우변과 중앙에 걸친 흑 세력은 매우 견실한 모습이다.

자칫 공격만 당하다가 그대로 밀려버릴 수 있다.

 

 

 

 


[1991년 기왕전]

●이창호 9단 ○오송생 9단

상대 세력(진지)을 깨는 적정선은 과연 어디일까?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는 기사가 바로 이창호 9단이다.

백을 쥔 오송생 9단이 특유의 세력작전을 편 장면이다. 이9단의 다음 수는 그야말로 삭감의 교과서라 할만 하다.

이창호의 다음 수를 예상해 보시라.

 


이창호가 선보인 수는 바로 흑◆

이 수는 백의 전위병 A와 B를 잇는 경계선에 절묘하게 발을 들여놓는다.

이것이 바로 삭감의 요령이다. 상대 진영을 적절히 깎아내면서도 깊이 뛰어들지 않고 상대공격에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게 경계선에서 기가 막히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오송생 9단이 화장실에 간 사이, 이9단이 바둑판에 줄자를 대보고 둔 수가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백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백'가'로 받자니 흑A의 뒷문이 열려 있고 백'나'로 공격한다고 해도 쉽게 공격당할 말이 아니다. 주변의 흑이 두터워서 흑은 중앙만 수습하면 만사오케이다.

결국, 백은 다른 곳으로 손을 돌리고 말았다. 이9단이 욕심을 내어 흑◆의 한 줄 왼쪽으로 삭감했다면 백에게 공격당해 알 수 없는 바둑이 될 수도 있다.

흑◆의 삭감수, 입계의완의 한 수다. 흑 불계승

 

 

 

다시 김지석의 판으로 돌아와서.

이창호의 시범대로라면 김지석의 삭감수는 왼쪽 참고도의 백가 적당해 보인다.

백▲는 흑 세력의 전위병 흑△와 흑X를 잇는 경계선에 딱 버티고 있다.

 

 

 

 

그러나 김지석 프로가 선택한 수는

백▲

앞선 참고도보다 더 완만한 입계의완의 수다.

흑A로 받으면 우중앙에 걸쳐 꽤 큰집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김지석의 느긋함에 딩웨이가 오히려 흑A로 받기를 거부한다.

'백▲가 좋은가 아니면 한 줄 오른쪽이 좋은가'라는 논란은 있겠지만, 승부를 서두르지 않은 이 수가 결과적으로 이 바둑을 승리로 이끄는 토대를 마련했다.

 


[1995년 한·일신예 정상대결]

● 류시훈  ○ 이창호

이창호 입계의완의 결정판을 보자. 백의 이창호 9단이 둘 차례이다.

흑을 쥔 류시훈 프로의 세력이 어마어마하다. 흑 진영을 지금 삭감하지 않으면 아방궁으로 커질 조짐. 대부분 관전객이 하중앙 삭감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하변은 백A가 그냥 죽어 있는 돌이 아니다. 백'가'의 붙임수 등과 연계하여 백A는 언제든지 꿈틀거릴 수 있는 생명력이 있다.


예상을 깬 이창호의 백◆

아! 탄식이 절로 난다. 분명히 하변의 맛을 노리고 하중앙 쪽으로 삭감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백◆는 상변 백진영을 넓히면서도 상대세력을 삭감할 때는 완만해야 한다는 '입계의완'의 순리에 그야말로 충실한 수이다.

이창호의 백◆가 최선의 수인지는 논란이 있겠지만 자신의 세력을 넓히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상대진영을 삭감하는 이 장면은 우리네 아마추어들이 확실히 배워둬야 한다.

 

 

 

이어지는 실전진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이 하변의 맛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실전진행에서 백은 하변에서 멋지게 수를 내어 충분한 이득을 보았다.

이창호 3.5집 승

 

 

 


<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 8강전>

● 콩지에 9단  ○ 최철한 9단

입계의완에 어긋난 수를 보자.

최철한 9단의 백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처럼 무시무시한 포식성을 자랑하는 최9단의 기풍과 백▲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체형과 전혀 다른 타개의 옷을 걸친 부자연스런 모습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입계의완의 순리를 정면으로 거스른 수이다.
 

 

 

당연히 백정도로 완만하게 삭감할 자리였다.

좌변은 백A, 달콤한 비마끝내기가 남아 있어서 일당백의 흑집이 아니다.

입계의완의 한 수다.

 




 

바둑을 흔히 인생으로 비유하는데 입계의완이 어찌 바둑에만 국한되는 순리이겠는가? 입계의완에는 바둑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인 '흑백의 조화'가 담겨 있다. 상대진영을 초토화해서 온통 자신의 천지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99집을 짓는다면 나는 100집을 짓겠다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있다면 입계의완은 저절로 구현된다. 일단 상대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야당이 있어야 여당이 있고 여당이 있어야 야당이 있다. 노(勞)가 있어야 사(使)가 있고 사가 있어야 노가 있다. 보수가 있어야 진보가 있고 진보가 있어야 보수가 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초토화하고야 말겠다는 식의 대치는 결국 자신도 중상을 입을 뿐이다.

바둑이나 인생 모두 입계의완은 진리요 순리다.

 

 

최철한 9단의 바둑을 다시 보자.

최9단이 둔 백▲는 분명히 입계의완의 순리에 어긋난다. 질책을 받을만 하다.

그러나 이 수를 열도(列島) 모퉁이의 한 사나이, 그가 두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 수를 탓해서는 안된다.

 


 


 

왼쪽 참고도의 흑는 열도 모퉁이, 그 사나이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인생의 축소판에 내려놓은 한 점이다. 입계의완의 순리를 정면으로 거슬렀다.

그 사나이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어 생존한계를 시험하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에 대해 관대해야 한다.

지구라는 온생명은 대자연의 법칙에 의해 굴러간다. 바둑에도 바둑의 법칙을 관장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이 장면을 용서해야 한다.

 

 

위 참고도 흑▲의 주인공은 바로 조치훈이다.

1960년대 초, 당시 바둑후진국이었던 한국을 떠나 명인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꿈을 품고 조남철 9단의 손을 잡고 6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치훈.

입단을 향한 원생리그전에서 11살 치훈은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입단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꼬맹이 조치훈은 일본바둑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 후, 그는 고백했다. "난 그때 감각을 버렸다. 감각은 불확실하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백 퍼센트 확실한 수읽기에 의존해야 했다."

 

 

[1968년 원생 리그전]

● 조치훈 ○ 小杉勝

백이 로 내려선 장면.

몸통인 흑△에 붙어있는 흑X까지 살릴 것인가 아니면 흑X는 도마뱀의 꼬리로 취급할 것인가, 중대한 흑의 갈림길이다.

11살 꼬맹이 조치훈의 선택은?

 

 

 

치훈의 선택은 흑 두 점을 살리는 것이었다. 이 수는 백이 흑을 통째로 잡으러 왔을 때 그 후의 변화에 대해 확실한 수읽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행할 수 없다.

입단의 중요한 관문에서 치훈은 흑1로 이은 후의 60수에 가까운 변화에 대해 정확하게 수읽기 했다.

 

 

 

 

 

흑3 ☞ 백8의 자리

수상전에 걸렸을 때 하변 흑 대마는 6수에 불과하다.

백10으로 백의 활로가 창창해 보이지만 흑11로 치중 가자 백의 살길이 만만치 않다.

이후 30여 수가 쭉 진행되어 백 대마는 절명한다.

 

 

 

 

조치훈 그가 누구인가?

일본바둑이 천하를 호령했던 80년대 초, 최고기전 기성전에서 후지사와에게 3연패의 벼랑으로 몰렸지만 4연승으로 한국인의 근성을 일본열도에 떨친 그다.

1986년 고바야시와의 기성전 도전기에서 교통사고로 온몸에 깁스를 하고서는 바둑판에서 죽겠다고 휠체어를 타고 대국장에 홀연히 나타난 그다.

정상에서 한번 내려오면 다시 정상에 오르기 어려운 순리를 거스르고 교통사고 후 절치부심, 대삼관을 차지하며 부활했던 이가 바로 그다.

 

 

·현대바둑을 꽃피운 일본에서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본인방을 움켜쥐고 필생의 라이벌 고바야시가 그토록 염원했던 본인방 획득을 3년 연속 극적인 역전승으로 좌절시킨 이가 바로 조치훈이다. (고바야시는 본인방을 차지하지 못해 대삼관을 이룩하지 못한 기사로 남아있다. 반면 조치훈은 본인방 10연패를 달성해 일본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일본 3대 기전에서 3연패 후 4연승을 가장 많이 한 기사가 바로 조치훈이다. 물 건너 온 이중허리 임해봉도 조치훈의 집념에는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목숨을 걸고 둔다."

꾹 다문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이 나지막한 외침은 알량한 승부욕이 아니다. 일본기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처절한 근성이 이 말에는 배어 있다. 이종범과 이승엽을 돌아보아도 일본에서 살아남아 이름을 남기기란 얼마나 피를 말리는 일인가?

 

[1985년 제9회 기성전 도전기 1국]

● 조치훈 9단 ○ 다케미야 9단

1985년 기성전 도전기 1국을 한국에서 치렀을 때 상대기사 다케미야의 세력에서 타개에 성공했던 조치훈은 이렇게 술회했다.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

 

 

 

 

 

 

관전기를 쓰려고 동행한 일본작가는 이 말을 이렇게 풀이했다.

"한국인으로 일본기계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고 또한 일본 생활에 익숙한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로 어렵다."

 

 

 

 

 

 

 

다케미야의 우주에서 조치훈은 흑1과 15의 유영(游泳)으로 극적으로 활로를 찾아냈다.

 

 

 

 

 

 

조치훈의 처절한 타개에는 일본기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의 바둑인생이 투영되어 있다. 연해주의 한인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버려졌을 때 땅을 파고 움집을 지어 살아남았던 처절한 몸부림을 조치훈의 타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치훈의 무모해 보이는 뛰어듦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조치훈의 타개를 보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는 최홍만의 경기를 보며 투지도 근성도 찾아볼 수 없다고 투덜 되지만 우리에겐 조치훈이 있음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은가?

순리라는 말에서 순은 順(순)이다. 順의 왼쪽에 내를 뜻하는 川(천)이 있듯이 순(順)은 도도한 물의 흐름을 일컫는 말이고 또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뜻이다. 순의 반대는 역(逆)이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물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의미이다.

바둑의 순리를 거스르고 강렬하게 대쉬하는 조치훈의 모습에서 우리는 물의 흐름(順)에 역행하여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강인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조치훈은 폭파전문가가 아니라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어 생존한계를 시험하는 구도자(求道者)일 뿐이다.

그렇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치훈을 향해 "왜 입계의완의 순리에 역행하여 무모하게 뛰어드는가?"라며 감히 지적할 수 없는 것이다.

 

 

 

바둑의 조화를 추구하는, 이창호의 입계의완은 진정 아름답다.

그러나 입계의완의 순리를 거스르는 조치훈의 강렬한 몸짓은 더욱더 아름답다.

 

 

 

 

 

사진출처 ☞ 월간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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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 |  2009-12-04 오전 10:5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곰도리 |  2009-12-04 오후 1:34:1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 강력추천 꾸욱 눌러봅니다.  
서울토바기 |  2009-12-09 오전 12:08:5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멋진구성.좋은글 감사합니다.  
수니짝 |  2009-12-11 오후 9:48:4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입계의완을 넘는 투혼 ..멎집니다 !  
체리통 |  2009-12-14 오전 12:42:0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흐미  
사랑아빵 |  2009-12-16 오전 10:38:4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철하니 바둑보구 모라구러는 하수들..반성하시오.
응씨배 우승자가 뒀는데 하수들이 뭘 안다고 무모하단 표헌을 하는지....  
서울아재 |  2010-01-06 오전 11:54: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조치훈 다시 한 번 빛나길 바람.  
ace315 |  2010-02-26 오전 2:10:0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은 모르지만 조치훈을 우리 한국 기원에서는 너무 대접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철한짱드삼 |  2011-05-27 오후 10:45:4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좋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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