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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고독한 노동의 기쁨에 바둑을 너무 권하지는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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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고독한 노동의 기쁨에 바둑을 너무 권하지는 말게
2003-05-26 조회 9137    프린트스크랩
이제는 나를 농삿군으로 불러주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농사랍시고 처음 벌여놓기는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지만 아무래도 도회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러구러 십여년을 뜻없이 보내다가 삼사 년 전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을 계기로 제법 본격적인 농사를 하고 있는 셈이기는 하다.

작년 가을에는 처음으로 트럭에다 소출을 실어나를 만큼 거둬들이기도 했으나 농삿군으로 불리어진다고 해서 낯뜨거운 생각이 들 까닭도 없다.

다 알다시피 농사란 새벽부터 일어나 팔다리를 걷어부치고 땅거미진 후까지라도 흙과 범벅이 되어 지내는 따분하고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 따분하고 고되다는 것이 기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도회의 생활과는 달라서 흙 묻지 않은 팔꿈치 쪽을 골라 이마의 담을 닦는 정도의 작은 휴식도 도회인들이 벼르고 별러서 떠나는 바캉스 못지 않은 즐거움인 것은 농사와 도회를 다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끄덕여 줄 수 있으리라.

천리길을 멀다 않고 가끔 내 축축한 농막을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어 나의 농촌 생활의 기쁨은 한층 돋보인다.

시인이나 농삿군이기 이전에, 꾀와 힘을 같이 갖춘 아마4단의 기객(棋客)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나를 찾는 친구들이 내 농막에 바둑 한 틀은 커녕 깨진 조갯돌 하나 놓여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모두들 의아해 한다. 바둑에 취미도 있으니만큼 농사 틈틈이 바둑판 앞에 앉는 것이 적당한 휴식도 되고 격에도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친구들이 권하지만 나는 서슴없이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들를 때에는 꼭 바둑 한 틀을 마련해 보겠다는 그들의 친절을 여러 번 사양해야 했다.

농사는 혼자 하는 것이지만 바둑은 둘이 할 수 밖에 없는 도회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설사 두 신선이 바둑판에 마주 앉았더라도 썩은 도끼자루를 괴고 본분을 잊은 채 구경하는 나뭇군과 함께 그것은 하나의 도회의 풍경이겠기 깨문이다. 하물며 그 유명한 '윗산'의 일곱신선이 한 자리에 모였다면 세상의 구름위에도 몇 안되는 신선중의 일곱명이란 7백만명이 밀고 밀리는 도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재작년 이 고을에 원님으로 부임한 R씨가 내 국민학교 동창생이자 고향에서부터의 기적(棋敵)이어서 가끔 읍내에 불려가 바둑을 두었지만 전과는 달리 승부에 관심이 없어 시들하던중 마침 그 R씨가 다른 곳으로 영전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보름에 한 번, 한달에 한 번 서울에 다니는 날에는 집보다는 먼저 한국기원에 들러 나를 아무때고 생각나면 잡아 먹을 수 있는 무슨 '오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가볍게 두들겨 패주는 것으로 내 아마 4단의 면장 위에 쌓인 먼지를 잠시 털어내곤 하는 것이다.

-1978 신동문(辛東門) 시인

▶글의 배경

○... 글의 저자는 신동문(辛東門, 1928.7.20 ~ 1993.9.29 충북 청주), 시인이며 저널리스트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 1957년 문단에 등단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어로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4.19혁명시기의 정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히게 됐다.

- 1965년, 신동문 시인의 활동은 박정희 정권의 뜻에 계속 거슬리게 되었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절필했다. 문학작품을 쓰지 않게 된 것이다.

- 신동문 시인은 65년 이후 충북 단양에서 농장을 꾸려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시인은 93년 췌장암으로 타계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장기를 모두 기증했다.

- 작가이기 이전에, 소탈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신동문 시인은 바둑계와도 교류가 많았다. 이 글은 홀로 농사를 짓는 시인을 찾아오는 서울의 옛 바둑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감상이자, 한편으로는 본인 스스로 아마추어 고수의 실력을 갖추었기에 느낄 수 밖에 없는 바둑에 대한 자부심과 은근한 사랑을 또한 이야기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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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0307 |  2006-07-07 오전 12:5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분의 맘가짐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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