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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들의 소도구와 수읽기 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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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들의 소도구와 수읽기 백태
2003-07-24 조회 11580    프린트스크랩
바둑에서 '수를 읽는다'는 것은 돌과 돌이 얽힌 한 장면에서 향후 전개될 일련의 추이(推移)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을 말하는데 한참 진행중인 대국실에 가보면 수읽기에 몰입한 프로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프로들은 각각 수읽기의 몰입에 필요한 소도구를 가지고 다닌다. 휘호가 씌어진 부채라든가, 손의 혈을 자극하는 금침구(金針球), 지압기, 악력기 심지어는 연고제의 일종인 청랭유(淸冷油×타박상이나 근육통에 바르는 안티플라민과 유사한 냄새를 가진 중국산 연고제로 '호랑이기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장주쥬×루이나이웨이 부부가 특히 애용하고 있다)까지 등장한다.

이 챙랭유는 대국 때 관자놀이에 발라두면 특유의 냄새와 화끈한 자극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정신집중이 절대전제인 수읽기에 도움이 될 듯하다. 그렇지만 프로들이 가장 애용하는 소도구는 단연 부채다.

한때는 손에 착 들어오는 맛이나 접었다 펴는 지음(紙音)이 일품인 일제 쥘부채가 프로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요즘은 바람이 풍성한 국산 합죽선의 애용도가 높다. 부채가 프로들의 소도구로 각광받은 이유는 그 손맛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채에 실린 휘호가 프로들의 개성과 품위를 살려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20세기의 기성(肌聖)'으로 불리는 우칭위엔(吳淸源) 선생의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은 선생은 물론, 부채를 애용하는 기사들의 품위까지 격상시켜주는 최고의 휘호다. 간략하게 내용을 밝혀보면, 중용(中庸)의 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 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이라는 글 중에서 인용한 것으로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친 것은 그 화려함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 것과 같이, 군자의 도는 어두운 듯하나 날로 밝아오고 소인의 도는 확연한 듯하지만 날로 사그라진다'는 뜻이다.

이밖에도 일본 최고(最古) 타이틀 本因坊 9연패의 금자탑을 쌓은 故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9단의 휘호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이 널리 애용되고 있으며 37년만에 그 기록을 깨뜨린 조치훈 9단이 本因坊 5연패 때 하객들에게 나누어준 기념부채에 실린 '君看白日馳 何異弦上箭(시간의 흐름은 막 쏘아지려는 화살과 같다)'도 부채휘호의 백미로 꼽힌다. 90년대 후반부터 휘호부채를 만들기 시작한 한국에서는 바둑계의 대부 조남철 선생의 '手談忘憂(바둑으로 삶의 근심을 잊는다)', 김인 국수의 '鉤玄(현묘함을 낚는다)', 유창혁 9단의 '又日新(나날이 새로워진다)' 등이 볼 만하다.

대국실에 들어서면 부채를 접었다 폈다 리듬감을 즐기거나 금침구, 지압기를 움켜쥐면서 수읽기에 몰입한 프로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표정이나 동작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는 조훈현 9단. 조9단은 대국중의 독백으로 유명하다. '으응, 이런 수를 두고 있으니…' 등등 상대가 누구든지 의식하지 않고 신음섞인 혼잣말을 멈추지 않는다(이 뒤에 '망하는 게 당연하지'라든가 '질 수밖에 없지'라는 말이 따라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오산. 불평 가득한 이 독백은 대부분 엄살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조9단 정도는 아니지만 대국중 엄살로 조 9단과 비슷한 경지(?)를 보여준 기사가 최규병 9단이다. 잘 두다가도 갑자기 '이런 미친 ○!(물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든가 '어, 이게 뭐야!'라면서 상대방까지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표정을 짓는데 대국결과는 언제나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 정도는 약과죠, 어떤 때는 바둑을 두다가 좀 만족스럽지 못한 수를 두면 '이런, 손모가지를 잘라버리든지 해야지!'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는걸요. 그래놓고도 바둑은 꼭 이겨가거든요, 그거 참…' 절친한 K5단의 증언인데 과연 이쯤 되면 조9단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이밖에도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다든지, 쉴 새 없이 자세를 바꾼다든지 별별 모습이 많지만 수읽기의 몰입 자세 하나로 뭉클한 감동까지 안겨준 기사가 있다. 의외로, 나이 어린 이세돌 3단이다. 이 소년은 수읽기에 깊이 몰입할 때면 반드시 허리를 낮게 굽히고 턱을 고이는데(여기까지는 비슷한 포즈의 기사가 많다), 다음 동작부터가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턱을 고인 손을 가만히 말아 쥔다. 그러면 주먹쥔 엄지와 검지 위로 도톰하게 주름살이 접히는데 그 위로 살그머니 입술을 갖다대고는 조용히 문지르기 시작한다. 이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반복동작에는 미묘한 리듬감이 있다.

아마도 소년은 이 미미한 반복동작의 리듬에 수읽기의 호흡을, 박자를 맞추는 것 같다. 그 평화로운 자태가 마치 양수에 잠겨 안식중인 태아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지금까지 그처럼 아름다운 몰입의 자세를 본 적이 없다. 진정한 몰입의 즐거움이란 스스로 몰입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지….

(손종수 wbstone@baduk.or.kr 200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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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땅만원 |  2003-09-26 오후 12:50: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f리듬이 필요 하다니요 저도 해보고 싶읍니다  
철퇴장군 |  2003-10-27 오후 5:2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세돌이와 달리 난 바둑판 뚫어지라 보면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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