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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이세돌] 3부: 명장이 빚은 미완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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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이세돌] 3부: 명장이 빚은 미완의 대기
2003-05-22 조회 12561    프린트스크랩
이세돌은 왜 강한가.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우선 재능이다. 아마추어 5단 실력의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인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백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설혹 다소 과장된 얘기라고 해도 타고난 재능을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돌의 재능은 특출했다. 똑같이 공평하게 가르치되 강요하지는 않았으니 5남매 중에서 재능을 보인 상훈, 세나, 세돌만 바둑의 길을 택하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세돌의 실력이 가장 빠르게 향상하며 5년 앞서 입단한 형을 추월했으니 바둑에 관한 한 세돌의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프로 중의 프로, 강자 중의 강자는 재능만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서 좋은 스승이 있어야 하는데, 세돌의 경우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잘 아는 아버지가 그 역을 했다. 역사, 언어, 족보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학식을 쌓은 교사였던 아버지는 바둑 교육에도 탁월한 스승이었다.

아버지가 세돌에게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은 사활훈련. 바둑을 배우려는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형태 속에서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활문제를 지극히 싫어한다. 그러나 이 사활훈련이야말로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수읽기의 힘을 키워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세돌은 아버지가 밭일을 다녀오는 동안 하루종일 그런 사활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생활을 수년간이나 계속했던 것이다. 신예기사 중에서도 정확하고 빠르기로 정평이 난 세돌의 수읽기는 이미 이 시기에 거의 틀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수읽기, 담대한 배짱

제5회LG배결승1국<장면도 1>은 바둑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1국인데, 이세돌의 정확한 수읽기에 의한 타개가 돋보이는 중반전 하이라이트(● 이창호 : ○ 이세돌)다. 수순은 좀 길지만, 흑이 ▲로 찔러 좌변 백 일단을 핍박해왔을 때 백 1 이하 21까지 선수로 삶을 확보하고 우상귀 백 23으로 붙여가 대세를 결정짓는 장면이다(좌상귀는 백A, 흑B, 백C의 패맛도 남아 있다).

좌변 백의 능란한 수습으로 인해 대세력이 궤멸된 이후 실리부족에 시달리던 이창호는 하변 흑 두 점을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대마를 죽이고 자멸하고 만다. 이창호로서는 보기 드문 완패였다.

이세돌이 보여준 것은 정확한 수읽기에 의한 타개였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세계 최강자를 상대로 한 몸싸움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최강의 수단으로 맞부딪쳐 간 결과라는 점이다.

여기서 볼 수는 없으나 이후 종반 하변 흑 대마를 잡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18세 소년의 담대한 배짱이 부동심(不動心)으로 세계를 제패한 이창호를 뒤흔들어버린 인상적인 한 판.

이 대국에서 패한 이창호는 “포석부터 중반에 들어설 때까지 흐름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컨디션엔 이상이 없다. 빨리 잊고 내일 바둑(결승 2국)에 전념하겠다. 이세돌 3단에 대해서는 이번 승부가 끝난 뒤 평가하겠다”며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이튿날 또다시 역전패, 바둑팬들을 놀라게 했다.

연패 후 인터뷰를 거부한 채 검토실에 들러 최규병, 유창혁 9단 등과 복기, 검토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렸으나 그 충격의 여파로 식욕까지 잃었다는 후문이다.

이 대국에서 보여준 정확한 수읽기와 담대한 배짱이야말로 이세돌 바둑의 두 축이다.

제8기배달왕도전5국<장면도 2>는 제8기 배달왕기전 도전 5국. 이세돌이 흑 ▲로 우상귀 백을 위협한 장면인데 귀를 지키지 않고 백 △로 뚫어 차단한 것이 유창혁의 착각이었다(● 이세돌 : ○ 유창혁).

다음 흑 1이 통렬한 급소로 백은 살 수 없는 모양이 됐다. 백 △로 8의 곳을 막았으면 무사했고 이후 평범한 끝내기를 거쳤으면 백이 두터운 형세였다. 백 △의 착각을 간파하고 즉각 우상귀 백을 잡으러간 흑 1은 빠른 감각과 강인한 결정력이 돋보이는 한 수였다.

똑같이 수읽기에 관한 표현인데 ‘수가 깊다’는 말과 ‘수가 밝다’는 말은 어떻게 다를까. 비슷한 것 같지만 두 표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수가 깊다’는 것은 향후 반상(盤上)에 전개될 일련의 추이(推移)를 멀리 내다보는 힘이 강하다는 뜻이고, ‘수가 밝다’는 것은 부분적인 돌의 접촉이나 형태에 감춰진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빠른 감각, 강인한 결정력

따라서 ‘수가 깊은’ 기풍은 대체로 장기전에 강한 역전형이며, ‘수가 밝은’ 기풍은 국지전, 난전에 강한 속전속결형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기사가 조치훈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조훈현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피말리는 초읽기 중에 우상귀 백을 잡으러 간 흑 1은 어느 쪽에 속할까. 당연히 후자다. ‘수가 밝다’는 것은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과 같다. 상대가 착각을 범하는 일순간에, 그것도 초읽기중에 ‘이 돌의 형태는 살 수 없는 모양’이라는 것을 간파해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살 수 없는 돌’이라는 판단이 내려졌으면 다음은 살상(殺傷)의 실행이고 그 실행에 필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결정력이다. 장황한 설명을 거쳤지만 그것이 흑 1이며, 이세돌의 강점이라는 뜻이다.

이 대국만큼 승자와 패자의 명암을 뚜렷하게 갈라놓은 승부도 드물다. 승자인 이세돌은 배달왕 획득에 힘입어 2000년도 MVP로 선정됐고, 패자인 유창혁은 세계타이틀을 따내 가장 유력한 MVP 후보로 올랐다가 이 패배로 국내타이틀 무관(無冠)으로 밀려나면서 MVP 후보에서도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독특한 자기류(自己流)의 발상

대체로 일가(一家)를 이룬 명인, 국수들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상식의 틀을 깨는 과정을 거친다. 이 말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思考)만으로는 큰 완성을 바라볼 수 없으며 명인, 국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제6기박카스배<장면도 3>은 제6기 박카스배 천원전(● 이세돌 : ○ 윤성현). 세 귀를 차지한 백의 실리에 흑이 중앙 대세력으로 맞선 장면인데, 백 △로 차단했을 때 흑 1로 젖힌 수가 검토실의 기사들을 놀라게 한 기수(奇手)였다. 백 2로 잡히는 부분의 손해를 감수하고 흑 3∼7로 중앙 세력을 완벽한 집으로 굳힌 발상이 독특하다.

보통은 백 △를 두면 흑은 2의 곳으로 처리하고 마는 정도인데, 이세돌은 그런 상식의 틀을 깨고 멋들어지게 중앙 세력을 집으로 굳히는, 사석(捨石)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흑 1 이하의 수순은 그 발상에 남들의 사고가 미치지 않는, 자기류(自己流)의 영역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세돌은 강하다. 앞에서 보여준 깊은 수읽기, 빠른 감각, 담대한 배짱, 독특한 발상은 그런 강함을 충분히 입증한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 무엇인가 부족하다.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 등 정상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면서도 신예들을 상대로 곧잘 추락하는 것이다. 그 편차가 너무 크다. 분명히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이세돌은 도예가의 뇌리에 영감(靈感)으로 스친 자기(磁器)의 형상과 같다. 질 좋은 흙을 반죽하고 물레를 돌리며 빚기 시작했으니 아직은 완성된 그릇이 아니다.

그 영감의 형상이 완벽한 실체를 드러내려면 오직 자신의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끝에는 그가 숙연하고도 진지한 자세로 염원한 ‘최고’의 월계관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이창호를 뛰어 넘는 또 하나의 신인류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신동아 기고 : 손종수/wbstone@baduk.or.kr)

○... 이세돌은 글의 시점(2001년 2월)에서 아주 가까운 장래인 2003년 3월에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을 우승하며 이창호의 벽을 뛰어 넘었다. 이창호 9단을 뛰어 넘는데 2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 이창호 9단의 후배들중에는 최초에 가깝다.(그전 목진석 6단이 속기전인 KBS 바둑왕전에서 이창호 9단을 이기고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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