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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곡]바둑으로 미인을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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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이라는 한국의 만화가를 알고 있는지?
매우 특별한 소재를 소설이나 현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생한 만화로 그려내고 있는 허영만씨는 90년대 중반부터 유별나게 도박이나, 내기, 경마등의 승부와 타짜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면서, 스토리작가인 김세영씨와 호흡을 맞춰 '48+1', '오늘은 馬요일', '살라망드르', 그리고 가장 유명한 '타짜' 시리즈를 계속해서 그려내는 중에 있다. [살라망드르는 내기바둑이 포함된 바둑만화이다.]
이 만화들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군과 독특한 캐릭터들, 그리고 엄청나게 매력적인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 만화들에서 주목할 점은 승부와 스릴이 증폭하는 가운데 만화의 주인공이나 사기단이 벌이는 승부의 조작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데에 있다.. 특히 큰 것을 성공시키기 위한 정교한 조작은 언제나 방법과 전개가 비슷하다. 어찌보면 한국 주식시장의 시세조종(=작전)이라는 것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 전형적인 승부 조작의 방법과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타켓(target) :
목표와 대상이 정해진다. 돈일 수도 있으며 아름다운 여자 일 수도 있다.
2. 대상 주변의 상황을 완벽하게 컨트롤(제어) 할 수 있는 지 조사한다.
3. 대상에게 미끼를 던진다. (돈일 수도 있고 그 밖의 상당한 행운들이다.)
4. 대상이 된 사람은 자신이 받고 있는 행운이 자신의 실력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게 만든다. 대상자는 자신이 자신 주변의 상황을 자신이 컨트롤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결국 대상자는 자신이 노력을 기울이면 더욱 큰 행운을 성취할 수 있다고 밑는다. 대상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5. 계속해서 대상자가 만나는 주변의 환경을 조작해서 그가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심리상태를 만든다. 이것은 마치 대상자를 종소리가 나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로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대상자는 이제 주변환경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자극(조건)을 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6. 위5번이 완성되면 대상자를 상대로 기획했던 목표를 단숨에 얻어낸다.
7. 대상자는 '파블로프의 개'같은 상태이므로 조건 반사적으로 속아넘어 간다.
8. 대상자는 당하고 나서도 자기가 어떻게 당했는지 한동안은 정확히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국어 시간에 너무 졸지만 않았더라도 고려가요라는 우리 고유의 문학장르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사악지라는 책에서 고려가요인 '예성강곡'의 배경 이야기를 전하는데 바둑의 고수가 출현하고 승부가 있으며 큰 승부를 컨트롤하는 고수의 전개과정이 나온다. 현재에서도 사기도박단이나 작전세력이 사용하는 방법과 매우 비슷한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이야기를 살펴보자.
[예성강곡의 Story]
KBS에서 방영했던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史劇)인 태조 왕건(王建)을 기억하는지? 그 드라마에 초반기를 보면 주인공인 왕건의 배경세력인, 왕씨세력은 바다를 오가는 상인집단으로 송악(개성)에 자리잡은 해상세력이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해상을 통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었던 고려 왕조는 이후에도 예성강 벽란도를 통한 무역을 활발히 하였었다. 이 때의 해상무역의 영향으로 우리 겨레는 외부국가들에 고려의 발음과 유사한 코리아(Korea, Corea, Coree) 등의 음가로 알려지게 된 것이기도 하다.
고려사를 통해 고려는 북방진출을 줄곧 추진했었지만 북방에는 고려보다 군사력이 강한 여러 강성한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했었다. 예를 들면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등이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겠다. 문화가 발전하여 고려가 무역하고자 하였던 중국의 송나라는 북방의 제국들에게 쫓겨 별로 기를 펴지 못하는 국가여서 고려와 송의 무역은 육로보다도 주로 뱃길을 통해 하는 방법이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송에서 뱃길로 고려에 들어올 때는 항상 예성강을 이용했기 때문에 예성강 어구에는 송나라 상선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또한 그 시절 송나라 상인들은 대개 수백명씩 떼를 지어 고려에 건너왔으며 그들 상인을 통솔하고 고려국과 교섭하는 대표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들을 가리켜 두강(頭綱), 혹은 도강(都綱)이라고 칭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상인 중에 하(賀)씨 성을 가진 두강이 있었다. 그는 풍채가 좋았으며 풍류·예능에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어느 해 하두강이 중국으로부터 많은 물건을 싣고 고려에 건너와 예성강 어구에 배를 대고 고려국과 무역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객사(客舍)부근에서 뜻밖에 절세의 미인을 발견했다.
1단계 - 목표 발견 및 대상 탐색.
하두강은 미인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여성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때로 남성들은 자신들이 취할 수 없는 '반한' 대상에 앞뒤 구분없이 자신의 모든 정력을 소모하기도 하는데 지금 바둑고수 하두강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그리하여 하두강은 미인을 취하고자 미인의 주변을 탐문했는데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여인은 남편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인을 꼭 취하고자 하는 욕정에 눈이 뒤짚힌 하두강은 사람을 시켜 계속해서 뒷조사를 한 결과 그 남편이 바둑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풍류와 예술적 기질이 다분했던 사업가 하두강은 바둑에도 상당한 고수여서 바둑을 통해 미인의 남편에게 접근한다.
2단계 - 미끼를 던져라.
하두강이 미인의 남편과 실력을 숨기고 바둑을 두어본 결과, 고수인 그의 적수가 절대 될 수 없는 실력이었다. 애초부터 바둑이 관심이 아니었던 바둑고수 하두강은 약간씩의 물건과 재물을 걸어 내기 바둑을 두면서 잃어주었다. 미인의 남편은 하두강이 고수인줄은 전혀 모르고 그저 자신의 바둑으로 상대를 이기고 재수좋게 재물까지 따게 되니 고수인 하두강을 '아주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3단계 - "파블로프의 개"
미인의 남편은 계속해서 져주는 하두강에게 완전히 속아 언제든지 하두강과 바둑을 두면 이기는 것으로 믿게끔 되었다. 또한 내기의 재물또한 모두 자기것으로 믿게되어 바둑보다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아주 커지게 되었다. 즉 이제 미인의 남편은 하두강과 두는 바둑은 모조리 자신이 이기므로 바둑(자극)하면 재물(=행운, 반응)이라는 아주 간단한 도식의 함정에 빠져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것이다.
4단계 - 작전개시
하두강은 엄청난 인내와 작업끝에 미인의 남편이 이제 시쳇말로 '똥과 된장'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 돌입했음을 감지했다. 그리하여 하루는 내기바둑을 전과 같이 져준 뒤 "내가 싣고 온 배의 모든 재물을 내줄테니 당신도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걸라"고 권하였다. 하두강의 재물에 상응하는 재물이란 역시 하두강이 목표로 한 미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두강이 권했으면 어떤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걸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모든 행운을 거머쥘 수 있다고 착각. 욕심에 눈이 어두어진 남편은 흔쾌히 내기에 응하게 된다. 침착한 하두강은 '똥 오줌'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남편에게 용의주도하게 남편의 다짐까지 받아 논다.
미인의 남편은 "男兒一言重千金" 과 같은 경구를 써대면서 자신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내를 내기로 건다. 남편의 심리상태는 지금까지 바둑을 둔 다음 얻어지는 행운과 재물에 완전히 눈이 어두어져서, 오히려 하두강이 바둑을 진 다음 오리발을 내밀까봐 상당히 걱정하는 상황이다.
5단계 - 네가 얻는 행운의 너의 것이 아니다.
하두강은 지금의 한판을 위해서 맘에도 없는 대국을 두어 왔었다. 이제 목표였던 미인을 걸고 바둑을 두게 되어, 그것도 자신보다 하수(下手)인 미인의 남편을 대국자로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고, 젖먹던 힘까지 다하며, 바둑한판에 목숨을 걸고 두니 남편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중반이 되기도 전에 미인 남편의 형세는 절망적인 패배. 자신이 확언하고 다짐한대로 아내를 내놓아야 할 처지이지만 아직 '똥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멍한 상태에서 아내를 빼앗긴다.
아마도 남편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자신이 내기로 얻은 행운(재물)은 하두강이 일부러 준것이었으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하두강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 아내를 내기에 걸었다가 졸지에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만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미인의 남편이 얻었던 행운은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6단계 - 예성강곡 : 상황종료
슬픔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온갖 후회와 안타까움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이런경우 해결책은 미안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기나긴 작업(?)끝에 소원을 성취한 하두강이 목표로 삼았던 미인을 품고 배에 오르는 광경을 목도하는 남편이 그 절절하고 눈이 뒤집히는 심정을 하소연하며 부른 노래가 고려가요인 예성강곡(禮成江曲)의 전편이라고 한다.
이 노래를 하두강이 들었다면 아마 엄청나게 찜찜했을 터이므로, 하두강은 곧 바로 배를 몰아 멀리 해상으로 나아간다. 정상적인 부부를 교묘하게 파탄시키고, 유부녀(=미인)를 취한 것이므로, 작업의 인내와 절묘함, 그리고 승리의 쾌감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의 비도덕성으로 인해, 고려땅에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두강은 예성강곡을 듣는 순간, "여기서 오래있다가는 등뒤에서 칼 맞을 일이 생기겠구나" 하는 마음을 먹었을 지도 모른다.
7단계- 잠시쉬어가자.
PS: 이 고려 설화에서 알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은?
- 고려시대에도 광범위한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 내기와 도박 인신매매가 있었다. (여성등을 상대로 한)
- 개성상인이어서인가? 고려시대의 상인들은 어떤 상황에서의 불합리한 약속이건간에
대체적으로 신용을 지키려 애썼던 것 같다.
Review : 바둑고수 하두강(賀頭綱)에 대한 재조명
송나라의 바둑고수인 하두강이 실존했는지 아닌지는 아주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하두강과 같은 국제 교역상이 존재했었고 그들은 고려인과 바둑을 두면서 내기를 걸정도로 고려와 송 양국의 언어에 상당히 능통했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예성강곡의 내용대로라면 하두강은 송나라사람인데 고려인과의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국제변호사나 국제 사업가쯤 되었을 하두강은 사람들의 심리흐름과 착각현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설화에서 하두강이 사용한 방법은 오늘날 학문적으로 정리된 각종 사회 심리현상과 승부 조작의 가장 전형적인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설화에서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미인의 남편에 관한 것인데, 미인의 남편은 아주 멍청하거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닌, 자연스럽고 평범하며 평소에는 매우 성실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절대로 그가 바보 같아서 하두강의 꼼수에 걸려든것이 아니라. 인간은 꾸준하고 반복적인 동일한 자극과 반응에 의해 학습되면 그것이 진실이 아님에도 진실처럼 믿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속임수에 말려들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미인 남편의 경우. 이미 하두강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바둑에 임할 때마다 재물을 얻으므로, 너무 반복되다 보니 그것이 진실이라고 착각하게 된것이다. (만약 미인의 남편이 바둑을 두지 않고 다른 취미를 가졌다면 하두강은 같은 전개방법으로 다른 취미로 접근 했을 것이다.)
바둑고수 하두강. 그의 IDEA와 경고는 분명하다. "착각하지마라","너의 행운은 너의 것이 아니다". - 만약 당신에게 줄곧 좋은 일만 일어나고 기분좋은 경우만 발생한 다면 다시한번 주변을 샅샅이 의심해라. 당신의 환경과 주변의 결과가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조정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계속되는 행운과 노력이상의 보상에 대한 냉정한 의심.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다.
[예성강곡 - 후편]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 설화의 주 무대가 고려땅이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고려인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속터지는 결과로 이야기를 끝나지 않았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송나라로 배를 몰아 가전 하두강은 좋지못한 날씨, 즉 비바람을 맞게 되는데, 불길하여 점을 쳐보니 고려의 미인을 억지로 배에 태운 결과 하늘이 노하여 그렇다 하니, 다시 배를 돌려 문제의 미인을 고려땅에 내려놓게 되었다. 다시 만나게 된 부부가 그 기쁨에 다시 노래를 불렀으니 그것이 예성강곡의 후편이라 한다.
이야기가 실화를 토대로 한 것이면, 혹시 남편이 당시 고려의 수군(水軍)이나 무장세력을 동원할 정도로 권력이나 재물이 있었던 사람이거나. 아니면 당시 뱃사람이 부정한 방법등으로 취한 여자가 배에 있으면 재수가 없다는 강력한 미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될 때에는 결코 이렇게 예성강곡같은 비교적 해피엔딩도 불가능하니 항상 조심해야 겠다.
[badukdol/drago@badu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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