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돌이 운명처럼 놓여 있다.

진정한 문학은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김윤식'의 말이다. 김윤식은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가 당대에 문학계의 별이 된 사람이다. 나는 김윤식의 글을 읽다가 그가 바둑을 언급하고 있어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나는 김윤식을 본 적이 없기에 그가 바둑을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김윤식의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글을 좋아할 뿐이다.

김윤식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글을 평하면서 '운명'이란 말을 바둑돌처럼 놓고 있다고 했다. 운명이 어떻게 바둑돌 같은 것일까. 운명이 바둑판 위에 포석처럼 놓여 있다는 말인 듯한데 딱히 감이 오지 않는다. 루카치는 개인의 공부는 개인과 사회의 것만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천명한 사람이다.

운명.

김윤식은 분명 그것이 바둑돌처럼 놓여 있다고 했다. 운명이란 말에 나는 주역의 신명(神明)이 떠오른다. 공자는 신명이 밝은 사람을 이렇게 말했다. (마왕퇴백서본에서) '신명을 돕기는 하지만 시책(점수)의 숫자에 통달하지 못하면 무(巫)가 되고 숫자에는 밝으나 명(明)에 밝지 못한자는 사(史)가 된다. 나는 무와 사의 길을 가지만 그들과는 돌아갈 길이 다르다.'

운명은 신명의 눈으로 볼 때에만 보이는 개인의 미래겠다. 신명의 눈을 가진 사람은 무당이고 무당의 일을 기록하는 사람은 역사가다. 공자는 신명과 역사에 두루 자신이 있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다르다고 말한다. 철인 공자도 자신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가야할 길 그것이 운명인 것이다.

바둑판 위에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현광등을 끄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바라보이는 바둑돌 하나는 사선(絲線) 위에 외롭다. 사선 위에 놓인 바둑돌을 구한말의 고수이자 독서인이었던 '채극문(蔡極文)'은 실감나게 표현한다. 그의 출판물 '신정기보'에 있는 말이다. 신정기보를 이 땅의 최초의 바둑책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하지 말자. 신정기보 이전에도 바둑책은 있었고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의 바둑판. 이곳에는 장점이 20점이 찍힌 또 하나의 바둑판이 있다.)

오늘날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고있는 경쟁의 시대다. 우리는 극단적인 공간 위에서 삶과 죽음의 선상에 놓인 바둑돌과 같은 존재다.

(現世卽 生存競爭之全局也. 吾人是死線彷徨之分子也. 荀能着心究妙 隋機應變則於心事物制勝求活之道.)

채극문은 바둑인으로 오늘날의 바둑행정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채극문의 이 말은 김윤식이 말한 운명의 바둑돌을 어느 정도 이해시킨다. 채극문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오늘날 어떤 바둑인이 김윤식의 고민을 저토록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적어도 구한말의 바둑인은 지식인  대접을 받았다. 바둑고수들 중 사서(四書) 정도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운명을 생각하며 책을 집어든다. 망책(忘冊)이 살길이지만 나의 눈은 책을 향한다. 남명 선생은 곤궁에 흔들리는 자는 책을 볼 자격이 없다고 했다. 책을 읽는 사람도 자격이 있는 것일까. 독서의 계절이다. 출판계는 단군 이후 최악의 불황이라고 한다. 10월 회원들께서는 책 한권 읽어줄(?) 마음의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