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바둑팬들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한중일 바둑의 절대고수들이 겨루는 바둑대회가 줄지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다와 '백록담'을 품고 있는 한라산이 빚은 풍광은 제주도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어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제주도는 본토와 망망대해를 사이에 두고 오래도록 소외(訴外)된 지역이었다. 그러함에도 성산(聖山) 한라산과 신의 용소(龍沼)인 '백록담'이 있기에 한국인의 정서 속에 신화(神話)로 남아 수천년 동안 동경의 대상지로 인식되어온 곳이기도 하다.

교통이 열악하고 모든 여건이 불미하던 17세기 한라산 여행을 떠났던 용감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백호'라 불리던 임제(林悌1549-1587)였다. 임제는 28살 되던 해 과거에 급제를 하고 제주목사로 부임해 간 아버지(임진)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는 구실(?)로 멀고 먼 한라산 여행에 나선다.

임제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지방 관리로 발령을 받아 가는 도중에 명기 황진이의 묘를 지나며 시 한 수 지은것이 탈이되어 파직을 당한 경험도 있다. 임제의 자유분방함은 과거급제후 제주도 여행에 나선것으로도 짐작이 된다.

그때가 1577년 정월초로, 한양을 떠난 임제는 무안, 완도, 백도를 거쳐 제주도에 도착한다. 무려 37일 만이었다. 임제는 이곳에서 아버지를 보고 곧바로 한라산 등반에 나선 후 여행기를 쓴다. 이 여행기는 '제주도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임제가 한라산 정상에 오른 날은 2월16일이다.

- 정상에 오르자 그곳에 움푹 패인 못이 있었다.(到絶頂則坎陷爲池.) 석등(돌비탈)에 둘러싸여 둘레가 7.8리는 됨즉하다.(石燈環肴周可七八里.) 석등에 기대어 바라보니 물이 유리알처럼 맑고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다.(則水如玻藜之深不測.) 못가에는 흰모래가 깔려 있고 덩쿨이 뻗어 있어 세속의 기운은 한 점도 찾을 수 없다.(無一點依之氣.)

임제는 백록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돌비탈, 맑고 깊이를 알수 없는 못, 물가에는 흰모래톱이 깔려 있고 나무덩쿨이 그곳으로 뿌리를 뻗는 모습은 오늘의 백록담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모습이다. 임제는 백록담을 내려오다가 도중의 산중 암자에서 하루를 유숙한다.

암자의 이름은 쌍계암(雙溪庵)이다. 임제가 과거급제자 신분이면서 현직 목사의 아들인 때문인지 관할 사또가 술과 안주를 보내와 요기를 한 임제는 주지의 방에서 동료들이 두는 바둑을 보면서 고단하면서 보람찬 등정기를 마치고 있다.

주지의 방에서 바둑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암자 앞의 절벽을 산책하네.

깊은 계곡은 옛날 그 모습이고

늙은 바위는 계곡물 소리를 듣고 있네.

이곳에서의 하룻밤을 잊을 수 있으랴.

깊은 감동 다시 느끼기 힘들겠지.

훗날 서울에서 다시 꿈을 꾼다면

아득한 구름바다 그립겠구나.

(丈室看碁罷. 前臺崎仗時. 洞深山色古.巖老水聲奇.一宿那無數. 重尋未有期.京華他夜夢.雲海寄想思.)

임제는 주지의 방에서 바둑두던 모습을 증거한다. 440년전 남해의 외로운 섬 제주도의 깊은 산속 암자에서 바둑을 두던 '난가(爛柯)'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백록담의 모습이 많이 바뀌듯 바둑의 모습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우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