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군실기(將軍實記)는 일본 막부의 일기로 일본 역사서다. 역사의 기록은 어떤 분야에도 인색한 것이지만 바둑으로 시각을 좁혀보면 일본사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거의 한줌(?)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일본 바둑사가 '좌은담총'이니 뭐니 하며 풍성해 보이는 것은 순전히 소수의 연구자들의 노력이 피워낸 성과 때문이다.

'좌은담총'은 쇼군실기와 기소(碁所) 등에 내려오는 유언들을 모아 쓴 책으로 '샨사'와 조선통신사의 수행원 중의 한명인 이약사(李約士)와의 대국을 기록하고 있다. 샨사가 조선에서 온 관원과 석점바둑을 두어 이겼다는 것이다. 샨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기소(碁所) 칭호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명인(名人) 칭호를 받은 일본바둑의 일월(日月)의 존재 바로 그 사람이다.

이약사는 누구인지 불분명한 사람이다. 다만 샨사(1559-1623)의 활동기에 일본에 통신사가 간 적은 두번인데 그 사행단 중에서 이약사를 추측컨대 이경전(李慶全1567-1644)으로 보인다. 이경전은 '이산해'의 아들로 1590년 문과 급제하여 부친의 실각과 광해군 때 '유연경'을 탄핵했다가 유배생활을 하는 등 실의에 빠져 살다가 인조반정 후 조선통신사와 연경사신단에 포함되어 나름의 행적을 남긴 사람이다.

이경전은 '중립' '석루' 등의 자와 호를 쓴 사람으로 약사(約士)를 그에게 끌어다 붙이기는 힘들다. 그러나 약사라는 말이 부인을 호칭하는 소사(召史)와 비슷한 이두(吏讀)식 표기라면 샨사와 대국을 했던 통신사의 관원은 이경전일 가능성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경전은 '석루유고'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가 바둑을 이해했고 즐겼다는 점도 문집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가 당대의 세계적 고수와 석점바둑을 둘 정도의 기력의 소유자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경전은 팔방미인으로 여러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이경전은 야사집 '동패락송' '계서잡록' 등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이다. 시와 춤 그리고 문장에 능해 중국사신들도 그 실력에 탄복했다는 것이다. 이경전이 일본에 간 것은 3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家光)의 간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은 답신단을 보내며 선물로 조선조정에 바둑판과 알 등을 내놓았다가 창피(?)를 당한 사건도 이때의 일이다.

이에미쓰 시대 일본은 유구(오키나와)와도 교역을 튼다. 유구왕 상풍(尙豊)이 직접 사신단을 이끌고 일본막부와 접촉하며 우호를 다진다. 이 과정에서 폭풍을 만난 유구인들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가 이들의 배에 실려있는 물품에 눈이 먼 제주목사가 해적으로 몰아 모조리 참수하여 조선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도 일어난다.

제주목사가 참수를 한 유구인 속에는 유구의 왕자도 끼어 있어 외교문제를 걱정한 조선조정은 쉬쉬하며 덮기 바빴다. 일본은 유구와의 관계를 계속 살려 1710년에는 양국간의 바둑대회를 여는 단계로까지 발전시킨다. 유구사람들을 해적으로 몰아 죽이고 물품을 빼앗은 조선과 유구가 바둑이 유행하고 고수가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바둑대회까지 연 일본의 안목이 비교된다.

1710년 12월1일. 사절측과 바둑대회를 열었다.

          12월 6일. 사절측이 유구의 음악을 시연했다.

          12월9일.  다시 바둑대회를 열었다.

쇼군실기는 일본과 유구의 바둑대회를 기록하고 있다. 유구측의 방대한 문서자료인 역대보안(歷代寶案)에도 이 점이 확인된다. 유구는 바둑이 매우 강했다. 유구도 일본과 같은 무치석 바둑을 두고 있었다. 유구가 무치석 바둑을 둔 것은 일본의 영향이 아니다. 일본에서 무치석 바둑을 배운 것이 아니라 유구국의 자생적 바둑이란 말이다. 일본 위기(圍碁) 잡지의 기자들이 이 칼럼을 본다면 눈이 활짝 뜨일 것이다.

18세기초 바둑은 조-청-일 삼국을 넘어 유구 대만 필리핀 베트남 티베트까지 퍼져 있었다. 필리핀과 베트남을 거론하자 고개를 가웃하는 독자도 있겠다. 그러나 베트남도 한자문화권이고 조선 중국과 함께 과거제도가 있었던 나라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역사적 '기보'도 전하는 나라다. 이쯤되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둑상식은 도대체 무엇이 있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유구는 일본 남단에 있던 작은 섬이다. 그런 섬에서도 일본 중국에 사신단을 보내며 외교를 전개한다. 그러나 유구는 1410년 조선 성종1년에 조선에 사신단을 보내며 선물목록 속에 바둑판과 바둑알을 보낸 적도 있다. 역대보안의 자료로 조선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유구에 바둑이 보급되어 있음을 알고 놀란다. 그리고 사신단이 오면 바둑대회를 열고 그 실력이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재대결을 벌여 일본의 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은 조선에도 바둑 대국을 청한 적이 있다. 인조실록에 전하는 바둑기물 기록이 그것이다. 쇼군실기는 당시 사신단에 바둑고수를 배치한 기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대항전을 조선은 매정하게 물리친다. 청나라 사신단의 숙소에는 바둑고수와 바둑기물을 넣어주기 바쁜 조선조정의 이중성이 참으로 아쉽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칼럼에서 한가지를 알게 된다. 조-청-일간의 외교사는 물론 동아시아의 작은 섬에 불과하던 유구까지 바둑을 이용한 외교전을 벌였다는 사실 말이다.

* 기소(碁所)는 본인방 샨사가 히데요시에게 받은 칭호로 훗날 막부가 관리하는 관(館)의 호칭으로 쓰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