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格字) 무늬 위에서 태어난 바둑.

'고려사절요'는 한 편의 에피소드를 전한다. 공민왕 1368년의 일이다.

-6월 왕이 정비(定妃)의 궁에 행차를 하자 유모가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바쁜 농사철과 가뭄이 겹쳐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데 영전(궁궐) 공사를 그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노하여 유모를 내쳤다. 왕이 정비궁에서 이운목(李云牧)과 연회를 베푸는 것을 내기를 걸고 바둑을 두었다. (幸定妃宮，乳母告王曰，今方農時，旱太甚，願停影殿之役，王，怒黜之。○幸定妃宮，與李云牧，圍碁賭宴)

공민왕은 암군(暗君) 일색이던 고려말의 군왕들 중에서 탁발한 인물이다. 그가 펼쳤던 대원(對元) 정책과 일련의 개혁정치는 망국으로 치닫던 고려왕조의 마지막 희망으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놀이를 좋아한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Home Ludens)다."
네덜란드의 학자 '요한 호이징하'는 개인은 놀이를 통해 자아 안에서 문명을 창달한다 했다. 인류의 발전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개혁가인 공민왕은 궁궐을 수축하여 군왕의 권위를 세우고 조정의 위신을 강화하려는 자신에게 바른말을 하는 유모에게 분노(?)한다.

공민왕이 '자치통감'이나 '당서'를 읽지 않았을 리 없다. 당나라의 명신 '위징'은 직언을 받아들이는 자가 명군이고 그렇지 못한 자가 암군이라 했다. 공민왕은 일개 유모까지 작심(?)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현실을 등한시하고 놀이에 몰두한다. 연회를 여는 비용을 건 내기바둑으로 도피를 한 것이다. 개혁군주 공민왕도 그런 때가 있었다.

신화(神話)는 격자(格字) 무늬에서 출발한다. 중원인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天圓地方)다고 생각했다. 그 위에서 시간(古今)이 오고가고(古今往來) 한다는 것이다. 직방(直方)은 격자무늬의 출발이다. 격자무늬는 도시와 예술 그리고 전쟁까지도 출발하는 단초였다. 대치와 포위 그리고 창(槍)과 극(戟)이 춤을 추는 살벌한 전쟁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중원인들은 병사들이 발끝을 대치한 모습의 상형자인 위(韋)와, 울타리의 상현자인 구(口)에서 착안 위(圍)를 착안했고, 바구니 속에 든 돌의 상형자인 기(碁)를 합해 바둑, 즉 위기(圍碁)라 했다.

춘추시대 전쟁의 모습은 놀이와 비슷하다. 춘추시대의 전장은 규칙이 있었다. 활은 상대와 교대로 쏘며 한번 전차에 오르면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는 식의 단순하고 우직하다. 서로 마주보고 화살을 날리는 전장터에서도 교대로 활을 쏘아야 한다는 '주례(周禮)' '대대례(大戴禮)'의 인식은 희극적이다.

전쟁은 정치행위 이전에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극적인 놀이다. 전쟁은 엄혹한 시련을 담보하는 행위로 인류에게 고통을 주어 왔지만 그 전쟁에서 착안한 바둑이 전쟁행위의 반상재현으로 각광을 받아온 것을 보면 인간의 심성 속에 면면한 파괴적 본능의 실체가 가늠된다.

바둑은 격자무늬위에서 탄생한 신화다. 신화는 신화라는 부운(浮雲)으로 남아 실전(失傳)된 것이 특징이지만 바둑은 아직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다시 가을이다. 남원에는 '만복사지'가 있다. 남원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좌측에 있는 큰 절터에 한때 만복사가 있었고 그곳에서 아내를 점지해달라며 부처님께 메달리던 우직한 사내가 있었다. 그가 시리도록 푸른 가을 밤에  친구를 부른다.

누가 자기집으로 바둑두러 오라고 부르려나.

밤이면 창가에 앉아 불꽃점을 친다네.

(誰家有約敲碁子.夜卜燈花愁倚窓)

금오(金獒)신화에 나오는 시다.  금오(金烏)는 태양의 다른 말이다. 중국인들은 태양을 영물의 새인 까마귀로 보고 다소 역설적인 작명을 한다. 열개의 태양이 떠오르자 순임금이 '사곤'을 시켜 활로 아홉개를 떨어뜨렸다는 신화에서 나온 금오...  바둑은 신화의 시대의 메타포어다. 오늘도 바둑의 신화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