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청원은 바둑을 조화(調和)라 말했다. 조화는 모순이나 충돌 없이 상호간의 조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바둑에서 최상의 수를 지향하는 흑백간의 승부의 본질을 타협과 균형으로 보고 바둑의 덕목을 조화로 본 모양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바둑의 덕목을 형세(形勢)로 보았다. 조화(調和)라는 말은 오청원 개인의 인식이고 오청원팬들의 인식이다.

사실 조화(調和)라는 단어는 20세기에 출현한 일본식 조어다. 혹자는 오청원이 주역에서 조화(調和)를 취했다고 한다. 이 말은 주역의 조화(造化)를 혼동한 말이다. 역사적으로 바둑을 형세로 파악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조선후기인 '홍길주'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형세는 '관자'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다. 관자를 지은 관이오(官夷吾)는 '비와 바람은 감정이 없기에 그것을 맞은 사람도 원망이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기원전의 인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철학적 사유의 소유자다.

관이오는 범과 같은 맹수는 깊은 산속에 있어야만 위엄이 있다고 한다. 범이 민가로 내려오면 위엄을 잃게 된다고 한다. 군왕도 구중궁궐에 있을 때 위엄이 있다고 한다. 범이 산을 내려와 민가로 다가오면 위엄을 잃고 공포만 남아 범 자신과 백성들에게 화를 끼치 듯 군왕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형세를 바둑에 적용한 사람은 중국사람들이다.

'척계광'은 군대를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기세를 잃는 것이라 했다. 병법의 근본은 형세를 좇아 움직이는 것이라 한다. 형세는 병법과 바둑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단어다. 형세는 운용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 한다. 개인의 운명을 누가 만드나. 성공과 실패도 결국 당사자 본인이 만드는 것이다.

홍길주는 삶의 형세를 매우 잘 판단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칼럼 전편 참고). 홍길주에게는 바둑을 좋아하던 어머니가 있었다. '영수합서씨'가 그 분이다. 서씨는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석주' '길주' '인주'가 그들이다. 석주는 과거를 통해 벼슬자리에 나갔고 인주는 정조임금의 사위로 승승장구했다.

서씨는 판서를 지낸 아버지와 판서를 역임한 남편 등 한마디로 조선 최고의 행복녀(?)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의 군왕과 사둔을 맺을 정도의 막강한 집안의 안방마님에 출셋길이 보장된 장성한 아들들의 어머니였다.

시짓고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며

간혹 바둑으로 시름을 잊네

비개인 후 숲속길은 푸르고

바람부는 누각 밤은 더욱 맑구나. 

연못과 누각에 딜빛 드리웠고

강변에는 구름 안개 자욱해라.

이제 늙어 고향에 가려니

황금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서씨는 바둑으로 시간을 보냈다. 시를 짓고 바둑을 두며 집안일을 건사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서씨가 그저 행복에 겨워 비명(?)을 지르던 여자라면 칼럼의 주제가 아니다. 서씨는 행장에 놀라운 기록을 남긴다. 바로 둘째 아들이며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인 홍길주에게 한 말이다.

한 집안에 부귀영화가 너무 집중되면 종내는 화가 되니 너는 벼슬을 멈추라며 세 아들 중 가장 탁월한 문장이였던 홍길주의 벼슬길을 막는다. 홍길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19세기의 문장가로 남는다. 서씨는 현명한 사람이다. 서씨는 삶의 방법에서 형세를 잘 이해했다 하겠다. 서씨의 집안은 격동하던 조선후기 세도가들의 몰락사에서 부침 없이 편안했다.

어머니이자 시인으로 그리고 애기가였던 서씨의 영향을 가장 잘 받은 홍길주가 바둑은 형세고 인생도 한판의 바둑과 같다고 한 말은 이런 배경이 있다. 조화라는 말은 매우 세련되고 발전된 단어다. 그러나 바둑의 본질을 형세(形勢)로 간파한 옛 사람들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