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인이면 누구나 좋은 바둑판 하나 소장 하고픈 마음이 있을 것이다. 바둑판은 비자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좋다고 하나, 좋은 바둑판이 기력을 증강시켜 주는 것은 아닌 이상 분수에 넘치게 좋은 바둑판을 탐하는 것도 멋적은 일이다.

좋은 바둑판을 탐하는 것은 요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옛날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풍고 김조순이나 정원용 조두순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좋은 바둑판을 구해 반명(盤銘)을, 한 문장씩 기록한 문적을 봐도 그렇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도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바둑판에 붙여.

'상덕용'이 바둑판을 만들고 내가 명을 짓는다.

그 판 평평하고 그 판 곧으니 반듯하고 바르도다. 이겼다고 으쓱하고 졌다고 다투지 않으니 덕을 따름이다. 공자도 노느니 바둑도 좋다 하셨고 맹자도 '전심치지'를 비유하셨으니(다른 이유가 없다) 모자란 선비가 이를 명에 새기노라.

(碁盤銘. 尙德翁作碁盤 洪子爲之銘. 平其基直其行 方正勝毋僖敗毋爭 循德性 孔曰 賢乎巳 孟云 專心致志 有迂一士銘以識其意)

홍길주는 홍석주 김매순과 더불어 19세기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힌다. 홍길주는  일백년 이래의 문장이자 천년 후에는 장자나 사마천으로 평가될 것이다,라는 평가를 생존 당시에 받을 정도로 문단의 기린아였다. 이 글은 그의 문집 '현수갑고'에 수록된 것이다. 홍길주는 바둑을 좋아하고 시 잘짓던 어머니 영수합서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바둑을 이해했고 즐겼다.

위에 등장하는 상덕옹은 '상덕용'으로 육도와 손자병법에 능했던 무인이자 홍길주의 친구였다. 상덕용은 바둑판을 손수 제작해와 친구 홍길주에게 명(銘)을 청했고 홍길주는 기꺼이 화답한다.

홍길주는 바둑에서 덕(德)을 본다. 조선후기에 말하는 덕은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문화(文化)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덕을 행(行)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문(文)이다. 덕과 문을 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조선후기 정치집단의 문화적 과제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덕과 문이 피어나는 경성으로 가야한다 다그친 것도 당시대의 문화 탓이다. 홍길주는 사소한 바둑판 하나에도 덕과 문을 고려한다. 과연 아는 만큼 본다 하겠다.

한국기원 이사장실에 고균의 바둑판이 있다. 김옥균이 일본인에게 선물한 바둑판으로 김옥균이 명(銘)을 기록해 놓아 오늘날 한국바둑 앞에 역사적 유물로 거듭난 바둑판이다. 언젠가 조훈현 유창혁의 바둑판 사인을 보았다. 또박또박 정성을 다한 필체였다. 이창호 사인도 비슷하다. 몇몇 신예 기사들의 사인도 보았다. 귀엽다 할까 뭐랄까...

프로기사들에게 바둑 외적인 무엇을 바라는 것은 실례다. 그들의 사인은 기세가 느껴지는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한두 명 정도는 문기(文氣)를 보여주는 프로도 있었으면 한다. 오늘날 활동하는 수백 명의 프로들 중 몇명은 역사가 된다. 그들이 세상에 남길 것은 사가(史家)들의 기록과 유물일진대 바둑판 사인도 어느 정도는 격(格)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