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탁'에게 망년(忘年)을 잊고 자신에게 바둑을 두어 주는 등 교제를 허락했다는 글을 남겨 단양 사인암의 전설을 실증해준 이곡(李穀)은 귀거래사를 꿈꾸는 글을 남기며 유한(幽閑)을 말한다. 유한은 '두보'의 은일한 삶에서 나온 말로 산수간에 묻혀 잊는 듯 없는 듯 살고자 한 동양 지식인들의 안분자족이 깃든 단어다. 두보는 강가에 살면서 늙은 아내는 종이 위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자식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드는 삶이 행복이겠다 말한다. 고려사람 이곡은 두보시 유한에 담겨진 의미를 다시 끄집어낸다.

땅이 없으면 그만이지 무엇을 또 장만하려는가

강가에 집이 있으면 유한(幽閑)이지

아전들 세금 독촉은 늘상 있는 일이니 화낼 일 아니고

아이가 농사 지을 줄 아니 무얼 걱정하랴.

(無田亦可有何求/ 家在江村事事幽/ 吏自催錢休苦厭 / 兒能學稼不須愁).

이곡의 삶을 조선사람 '박주담'이 재현한다(자료1).
박주담은 함양사람으로 1938년 무인년에  함양 인근에 살던 이선비가 죽자 제문을 지으며 이곡이 우탁에게 했던 사연을 반복한다. 박주담은 말한다. 많은 나이 차이도 개념치 않고 교제를 허락하여 아침 저녁으로 집을 드나들며 바둑과 거문고의 음률을 즐기고 고담준론에 배인 풍류를 가르쳐 주어 고마웠다며 이선비의 생을 회고한다. 두 사람은 인근에 살면서 바둑으로 나이차를 잊고 오래도록 수담과 담론으로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였던 모양이다. 

조선의 많은 기록물을 살피다보면 바둑이 술과 담론과 연결이 되어 등장하는 장면을 곧잘 보게 된다.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오는 작자미상의 간찰(자료2)도 그중의 하나다. 친구간에 주고받은 편지로 보이는데 발급자가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고 쓰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수급자가 공부를 한답시고 산에 들어가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인들과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며 토론 등에 빠져 그런 것이 아닌가 묻고 있다.

통신은 간찰(편지)밖에 없던 시대 풍산문중 사람 김이섭(자료3)은 먼곳에 관원으로 나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추운날씨에 부여된 업무를 챙기느라 수고가 많겠다는 말과 여타 친구들과는 소식을 주고받는지 궁금하다고 묻고 객지생활이 바둑과 술 등으로 소일거리를 찾는다 해도 외롭고 서글픈 것이라면서 건강에 유의하라 말한다.

김이섭은 자신은 할일 없는 서생으로 시골에서 화로불 하나 끼고 어린아이들 몇을 가르치고 있다며 참으로 따분한 생활이라 토로한다. 초라하고 못난 삶의 반영이다. 그러나 이 솔직한 선비의 속내에는 화로불에 의지해 내가 아닌 타인(아이들)을 통해서라도 다시 한번 세상에 발분하겠다는 조선선비의 소망이 담겨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사람이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조선의 유학으로 성장할 재목이 끼어 있을 줄을...

     (자료1) 함양사람 박주담이 지은 제문                (자료2) 풍산김씨문중 간찰 

(자료3) 김이섭 간찰

또다른 늙은 사람 이충호(자료4)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에게 토로한다. 나이들어 늘그막에 거문고 바둑으로 소일하는 재미가 있으신가 묻고는 자신은 아직도 큰아들 작은아들 걱정이 끊이질 않아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며 건강까지 허락하지 않아 이제 손자들에게도 남길 말을 준비할 때라며 자신의 허접(?)한 삶을 회고한다. 사는 것이 다 그렇다.

이충호는 난자리와 들자리를 걱정한다. 유시유종(有始有終) 말이다. 하나 더 있다. 영암남씨 종택에서 나온 간찰(자료5)로 남효연이 수연에게 보낸 편지다. 이웃에 바둑을 잘두는 사람이 있어 그와 수시로 교제하고 바둑수를 배운다니 재미가 있겠다며 그러나 너무 그것에 빠진다면 그 또한 공부를 망치는 일이니 주의할 일이라 한다. 고착수법(高着手法)이란 말이 주목된다. 단수(段手)라는 말도 기록에 종종 보인다. 최근에 유행하는 수법(手法)이란 용어도 생각난다.

     (자료4) 이충호 간찰                                 (자료5) 남효연이 수연에게 보낸 간찰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며 당대의 화가였던 강세황은 여름피서로 계곡에서 벌이는 철렵을 추천한 바 있다. 마음 맞는 벗들과 계곡을 찾아 개를 잡아 안주를 하고 바둑두고 술마시며 보내는 피서는 선비의 마음과 정신을 살찌운다 했다. 강세황은 개를 잡아 놓고 바둑두고 술마시는 것은 풍습이라 했으니 동물애호가들의 시비대상은 아니다.

그렇다. 오늘은 분명 과거로 통한다. 과거는 오늘로 통하는 길이다. 과거를 안다는 것, 그것은 미래로 가는 고속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