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GS칼텍스 사보를 읽다가 한 구절에 초점이 멎었다. 우선 바둑마니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한국기원이사장께서 쓰신 글이고 무엇보다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대기업의 리더로 비상한 시국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한 내용이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한 거란족의 엘리트를 거론하며 기업의 내일을 준비하자는 요지의 글이 신선하다.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몽골제국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가 했던 “흥일리불약제일해, 생일사불약멸일사(興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 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고, 한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란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일을 벌이기보다는 줄여서 비용을 절감하자는 것이다.

야율초제는 거란족으로 금나라의 대신이었다. 그는 원에 투항하여 원의 건국기에 가장 큰 공적을 쌓은 행정가이기도 했다. 북방의 거란족은 고려 조선 등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거란은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여 서경과 개경을 함락시킨 적도 있다. 역사는 고려와 거란이 마주친 최전선에 바둑을 등장시킨다. 그 유명한 강조의 진중 바둑이 그것이다(이 설은 필자에 의해 바둑이 아니라 '탄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강조가 진중에서 오락을 탐닉하다가  거란군에 대패를 한 것이다.

거란에도 바둑은 있었다. 1977년 내몽고 '오한기백탑묘'에서 발굴된 13도 바둑판이 그것을 증거한다. 물론 당대 중국 고려 일본에 이미 19도 바둑이 퍼져 있는 상황에서 13도 바둑을 두었다는 점은 의문이기는 하다. 문화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흐르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하더라도 바둑에서 13도와 19도는 거의 10세기의 수준 차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필자는 13도 바둑판이 사지(寺地)에서 출토된 것을 주목한다. 신라의 분황사 15도 바둑판이나 장락리 바둑편(片)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이다. 당대의 거란의 문인들의  글을 보면 거란의 문화가 중국에 견주어 후진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거란의 엘리트들은 문언문(文言文)으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거란은 중원을 통일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애를 쓰기도 한다. 거란이나 몽고족은 북방의 기마족이다. 그들은 한 곳에 거점을 두고 생업을 영위하던 고려 중국하고는 사상(?)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 속에 바둑이 녹아 있는 것은 고려 중국과 닮았다.

원의 쿠빌라이는 특히 바둑을 좋아하여 중원의 고수는 물론 멀리 고려에서 고수들을 불러 바둑을 두게 하고 감상을 하며 살았다. 고려의 고수 '설성경'은 쿠빌라이의 지시로 아예 원에 이주를 해 와 궁중에서 산다. 야율초재(1190-1244)는 중원의 패자가 금에서 원으로 바뀌는 시대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대의 경영자다. 그도 바둑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금나라와 원나라에 만연했던 바둑을 염려하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 위기의 서로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람의 심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나의 자손들은 마땅히 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야율초재는 나라를 바꾼 배신자(?)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지 않고 위대한 행정가요 경영자로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개인적 역량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이 유언으로 바둑을 언급한 것은 당시 바둑이 젊은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탐닉거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어쨌든 바둑은 고려 말갈 몽골 거란족을 가리지 않던 중국 동북방 전역에 퍼져 있던 '기예'였다. 

야율초제를 들어 기업의 위기를 말하는 기업인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인물이 한국기원의 수장이라는것도 반갑다. 작금의 한국바둑이 유사 이래 가장 힘들다는 말이 들린다. 기전의 중단과 축소가 프로기사들의 생활을 옥죄는 지경에까지 달한 모양이다. 이런 중차대한 때 야율초제를 이해하는 수장이 마음든든하다. 그는 과연 어떤 타개의 묘를 보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