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바둑올림픽 응씨배(盃)의 결선국이 벌어지고 있다. 한-중-일-대만의 수많은 고수들의 쟁투를 뚫고 결선에 오른 이창호 최철한이 마주한 대국장은 기성 오청원의 입회로 응씨배의 위상과 권위를 보여준다. 바둑팬들은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노국수의 정정함에 놀라면서 그가 대국장에 내놓은 기제(棋題)가 단연 주목을 끈다.

하산일국기(河山一 局棋).


한판의 바둑 속에 산과 강이 있다. 바둑 속에 자연이 있다. 바다와 산은 한판 바둑이다.
노국수의 심정을 담아낸 '휘호'를 음미하고 해석하는 눈은 다양(?)하다. 과연 20세기 바둑의 대종사(大宗師)가 내놓은 기제는 공안(公案)이다. 선승들의 세계에 있는 화두(話頭)라 할만하다.

예부터 중국사람들은 바둑이 우주를 담아낸 어떤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고증하기 힘든 먼 옛날로 갈 것도 없이 청나라의 세조인 '애신각라복림'은 바둑을 건곤일국기(乾坤一局棋)라 했다. 한판의 바둑 속에 하늘과 땅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백년의 일은 하룻밤 꿈결이요.

만리 이땅은 한판의 바둑이다.

(百年世事三更夢/萬里乾坤一局棋)

산하는 산과 강을 말하는 것이지만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는 '고향' 또는 '조국'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말이다. '두보'는 춘망(春望)이란 시 속에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 했다. 나라는 망해도 산천(고향)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두보가 장안에서 안록산의 난을 접하고 망해가는 당나라를 보며 읊은 산하(山河)는 중국인들의 수구초심을 담아낸 말이다.

노국수는 산하일국기라 하신다. 노국수는 13세의 어린나이 때 만주에 온 일본바둑의 고수 '이와모토' 6단을 이긴 중국바둑의 신동이었다. 노국수는 만주의 군벌 '단기서'의 지원과 마지막 황제 '부의' 앞에서 바둑을 둔 천재였다. 이 일이 시발이 되어 일본에 유학해 오히려 일본바둑은 물론 세계바둑을 지도한 역발산이며 선기(善棋)다. 세상은 그를 기성(棋聖)이라 부른다.

이 노국수 앞에서 이창호 최철한이 40만 달러의 상금을 놓고 대국을 벌이고 있다. 노국수는 처음 3연전을 모두 지켜보며 자신의 지난 바둑인생을 돌아본다. 13세의 어린나이로 바둑 좋아하고 한문 잘하시던 아버지 오의(吳毅)의 손을 놓고 일본으로 건너온 지 70년이 지난 지금 범중화(대만인이 창설하고 싱가폴에서 대국), 곧 자신의 고향, 자신의 조국에서 두어지는 대국을 '하산일국기'로 표현하신 듯하다.

시원하게 알 수는 없다. 노국수의 마음을 감히 측량할 수 있으랴.  다만, 미루어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두보의 춘망을 다시 읽어본다. 한올도 없는 노국수의 머리가 오버랩 된다.

나라는 깨져도 산하는 그대로다. 장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진다. 시절은 꽃을 보며 눈물 흘리고 이별은 슬퍼라. 새소리에도 가슴이 떨리누나. 봉화불 연달아 올라오고 고향집 소식은 만금보다 귀하구나. 흰머리 긁을수록 짧아지니 이제 비녀로도 단조리를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