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의 대명사이자 당대의 예원의 총수였던 세종은 일찍이 자신의 아들들 중 무에 밝았던 장자 문종과 금기서화에 밝았던 3남 안평을 주목했다. 안평(李瑢 1418-1453)은 시서화에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였다. 안평은 안목에 그치지 않고 화가 '안견'이나 조순생 같은 바둑의 고수를 지근에 두고 자신의 별장에 천하의 기인재사들을 불러모아 시 짓고 그림 그리며 바둑을 두며 '한양문화'를 발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안평은 스스로 글씨에 탁발한 인물로 옥으로 만든 바둑판과 바둑돌을 고집할 정도로 호사(?)를 부린다. 안평은 무엇이던지 최고를 추구한 결벽성의 소유자였다. 안견같은 최고의 화원이나 세종의 총애를 받은 바둑고수 조순생의 발탁이 그것을 증명한다. 안평은 문종 사후 정치적 주도권 싸움에 뛰어들어 36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겨우 '용재총화'에 행적의 일단을 남기는 것으로 역사에서 퇴장한다.

용재총화는 안평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당대의 인물들을 암시한다. 특히 안평의 시제(詩題)를 받고 시를 쓴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최항, 성삼문, 서거정, 신숙주, 이개, 김수온, 임원준 등은 세종이 키운 집현전 학자들로 훗날 세조의 정치적 행보를 따라 각자의 길을 달리하게 되지만 한사람 한사람 면모는 범상치 않다.

이들 중 세조의 명에 따라 '위기오행법'이란 바둑책을 편찬한 임원준과 바둑에 죽고 바둑에 살던 서거정이 있다. 서거정은 안평의 면전에서 받아든 저녁 종소리란 시제를 받고 아래의 시를 짓는다.

화산에 버티고 선 푸른연꽃(인왕)산

절간은 첩첩산중 어느곳에 있는지

서쪽 고개에 반쯤 걸린 햇빛 머금고

산사에서 들리는 종소리 들리누나

놀랍도다 술취해 세상에서 추는 꿈

부러워라 고승들이 세상에 준 것들...

(종소리) 한밤중 추운 산속에서 들어도 좋은데

떠가는 구름도 물을 건너며 봄을 보낸다.

'비해당사십팔영' 속에 있는 수많은 시들 중 '저녁모종'이란 가작으로 서거정의 문장이 돋보인다. 비해당(匪懈堂)은 세종이 안평에게 내린 당호로 게으른 아들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예원의 중심이란 격려도 있어 안평이 특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거정은 안평과 정치적 행보를 달리 하지만 '금기서화'로 통하던 시대의 소통은 찰떡궁합이다. 서거정은 30여 편의 바둑글을 남겼고 스스로 적수가 별로 없다 자처할 정도로 고수기도 했다. 서거정이 안평의 별장을 찾고 이런 글을 지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거정이 지은 수많은 바둑글들 중 아래의 시가 저녁모종과 비교된다.

땡초가 와 큰소리로 바둑 한판 어떠냐고

바둑판 찾느라 시간이 더디네.

바둑에 헷갈리지 않은 사람 옛부터 적으니

이기고 패하는 것을 어쩐단 말인가.

(僧來長喚欲談棋 / 慵拂棋奩故故遲 / 當局不迷終古少 / 輸嬴勝敗竟何爲)

정치적 실각자 안평을 용재총화를 통해 세상에 소개한 성현도 바둑 마니아였다. 안평의 별장을 찾은 집현전 학사들 태반이 바둑시를 남기는 것으로 보아 당시대 바둑의 융성이 어떠했는지 가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