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오늘의 반면교사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회기본능의 유전자가 있어 언제나 당면한 현실 앞에 나타나 오늘의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전당시'에 전하는 당나라 사람 '장교'는 신라인 '박구'에게 특별한 바둑을 말한다. 박구가 당 황실의 기대조(棋待詔)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갈 때는 880년경으로 신라와 당의 관계가 가장 좋을 때였다. 장교는 박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海東誰適手/歸去道應孤/

闕下傳新勢/船中覆舊圖/

바다 동쪽에 (그대의) 적수가 있으랴. 돌아가면 (그 탓에) 심심하겠구나, 정도로 해독되는 이 시의 다음 구절이 '권경언'의 바둑인물사에는 이렇게 해독되어 있다.

(당나라) 대궐에 새로운 묘수 전파하고

귀국하는 뱃전에 옛기보 펼쳐보네.

이 글은 최남선 신호열의 것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이화'는 생각이 다르다.

(당나라) 대궐에서 새로운 바둑 배웠으니

돌아가는 배안에서 옛 바둑판은 버리게나.

이이화는 신세(新勢)를 주목, 17도 바둑판이 19도로 바뀌는 바둑역사의 분기점으로 해석을 한다. 망우청락집에 전하는 손책 등의 19도 기보가 후대의 위작임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 차치하고 필자는 이름 있는 역사학자의 의견에 움찔했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언급에 바둑판의 변화를 말한 거의 유일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이이화는 놀이와 풍속의 사회사에서 한반도의 바둑의 형식을 사배자식 바둑과 순장식 바둑의 혼용으로 볼 정도로 깊은 안목의 소유자다. 이이화가 주목한 신세는 최남선 신호열의 그것보다 진일보한 해석이다. '수서' '경적지'에 기세(碁勢)가 보인다. 경적지에 보이는 기세는 수법(手法)의 그것이 아니라 바둑의 형식 또는 방법의 한가지다.

경적지에는 기도(碁圖) 기품(碁品) 등의 단어가 보이기도 한다. 기세(新勢)라는 말은 새로운 바둑의 수법으로 이이화는 반상확대로 본 것이다. 그러나 수당 교체기에 완성된 19도바둑이 2백년이 지난 후 통일신라에 전파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신라와 당의 빈번한 바둑의 교류사를 감안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당나라 시인 '허혼'은 신라에 바둑의 고수가 많다. 특히 승려들이 바둑을 잘둔다 한 말도 '삼국사기' '당서' 등의 역사서가 아니라 해도 민간에까지 신라와 당의 활발했던 바둑의 교류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헤아리면 '장교'의 시는 다음과 같이 해독할 수 있다.

(당나라) 대궐에서 새로운 바둑의 수법을 알았으니

돌아가는 배안의 옛 바둑일랑 잊으시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역사는 죽은 사람들의 얘기다. 역사는 바로 죽은 사람들이 사실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다. 사실은 당대에도 시대가 지난 뒤에도 뒤틀리고 왜곡된다. '신세'라는 단어 하나에도 당대 최고(?)의 안목들이 서로 다른 해독을 한다. 그것이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