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땅의 모든 글쟁이 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박지원을 들겠다. 박지원은 연암 바로 그 사람이다. 연암은 열하일기로 우리와 친숙하지만 과연 일급 문장으로의 그의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글은 그가 남긴 몇 건의 묘지명이다. 연암이 여덟 살 때 열여섯의 누이는 시집을 가  마흔셋에 죽었고 연암은 이 누이를 기리며  묘지명을 짓는다.

- 유인(누이)은 열여섯에 덕수 이씨 택모에게 시집을 가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낳고는 신묘년(1771) 9월 1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 43세였다. 택모의 선산은 '아곡'인 바 그 곳 경좌(庚坐)에 장사할 참이다. 택모는 어진 아내를 잃고 어린 자식들과 더불어 살아갈 도리가 없으니 슬프다.

택모가 자식들을 앞세우고 솥과 그릇 몇개를 챙겨 상여를 따라 산간(山間)으로 들어가니...

연암은 누이를 끔찍하게도 아끼고 사랑했다. 누이가 일찍 죽자 그 누이의 애절한 삶과 매형 택모의 곤궁하고 비루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가난은 당대의 조선 선비들에게 있어 공통된 화두였다. 가난을 면한 선비는 그저 몇몇 운좋은 사족의 자제들뿐 여타 선비는 생활 자체가 가난이었다.

연암의 집도 별수 없었다. 친형인 박희원이 죽고 자신을 어머니처럼 키워준 형수가 죽자 연암은 형수의 묘지명을 짓는다.

- 형님이 연로하시면 장차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사셨으면 합니다. 담가에 뽕나무 심고 집뒤에 밤나무 심고 문앞에 배나무 심으면 어떨까요. 시냇가에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가득가득 심으려 합니다.

작은 연못에 치어 몇 마리 풀어 크기를 바라고 바위산에 벌통 놓고 들판에 소 몇 마리 풀어 놓으려 합니다. 나의 아내가 길쌈을 하고 형수님은 계집종이 기름짜는 것을 감독하며 밤중에 책 읽을 시동생을 도와주면 어떨는지요.

나의 이 말에 형수님은 아프던 몸을 일으켜 자신의 이마를 짚으시곤 '이는 오랜 나의 꿈입니다' 하셨지요.

이 글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도 왕종삼의 안빈낙도도 범접할 수 없는 현실성이 있다. 백일몽과 같은 조선 유학의 공허한 이상향은 연암에 와서 산산히 부서진다. 이 글을 읽노라면 도대체 조선시대의 정체성이 의심된다.

연암과 같은 당대에 인정을 받았던 대문장의 사람살이가 오늘날의 노숙자의 신분보다 못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연암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일찍이 장마 중에 여러 날을 아무것도 못 먹는 날이 허다했다.

오늘날 서울역의 노숙자들도 며칠간 밥을 굶는 일은 없다. 연암은 당대의 대다수 문인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연암이 장마통에 밥을 굶는 날이 많았다는 것은 당대의 지도층의 몰이해와 무능 탓이다. 나는 정조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 정조는 독불장군으로 혼자 똑똑했던 사람이다. 그의 독불장군에 연암 박지원은 한갓 허접쓰레기로 내몰린다. 정조는 정조실록에서 '박지원이 문장을 망친다'라 말한다.

연암은 한 후배의 삶을 기록하며 자신의 안빈낙도를 대변한다. 박지원은 꿈꾸던 것이 있었다. 책읽고 바둑두고 음악 들으며 길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양군은 본성이 게을러 들어앉아 있기를 좋아하며, 권태가 오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검은 궤(几) 하나, 거문고 하나, 검(劍)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옛 서화축(書畵軸) 하나, 바둑판 하나 사이에 퍼진 듯이 누워 버린다. 매양 자다 일어나서 주렴을 걷고 해가 이른가 늦은가를 내다보면, 섬돌 위에 나무 그늘이 잠깐 사이에 옮겨 가고, 울 밑에 낮닭이 처음 우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궤에 기대어 검을 살펴보고, 혹은 거문고 두어 곡을 타고 술 한 잔을 홀짝거려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하거나, 혹은 향 피우고 차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기도 하고 혹은 옛 기보(碁譜)를 들여다보면서 두어 판 벌여 놓기도 한다. 이내 하품이 밀물이 밀려오듯 나오고 눈시울이 처진 구름처럼 무거워져 다시 또 퍼져 누워 버린다. 손이 와서 문에 들어서면, 주렴이 드리워져 고요하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처마 끝의 풍경은 저절로 울린다.

(齋在古松蒼壁之下。凡八楹。隔其奧。爲深房。踈其欞。爲暢軒。高而爲層樓。穩而爲夾室。周以竹欄。覆以茅茨。右圓牖。左交窓。軆微事備。冬明夏陰。齋後有雪梨十餘株。竹扉內外。皆古杏緋桃。白石鋪前。淸流激激。引遠泉入階下。爲方池。梁君性懶而好深居。倦至輒下簾。頹然臥乎烏几一琴一劒一香爐一酒壺一茶竈一古書畵軸一碁局一之間。每睡起。揭簾看日早晏。則階上樹陰乍轉。籬下午鷄初唱矣。於是乎據几看劒。或弄琴數引。細吸一盃。以自暢懷。或點香烹茗。或展觀書畵。或棋按古譜。擺列數局已焉。久來如納潮。睫重若垂雲。復頹然而臥)

연암의 이 따뜻하고 사실적인 문장이 통치자로서의 자신의 치세에 흠집을 내고 있다고 본 것이 정조다. 문장은 법고창신해야 함에도 연암의 문장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굶어 죽어도 태평성대를 읊조려야 한다는 것이 정조의 문치관이고 통치관이다. 정조, 하면 성군이고 광개토대왕 대접을 하기 바쁜 학자들에게 묻고 싶다. 정조는 왜 박지원을 배척한 것일까.

연암과 같은 시기 사람인 홍길주는, 당대의 명사 다산 정약용을 아프게 지적하면서도 연암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인 평을 하고 있다. 연암은 바둑의 중요 기록을 몇 건 남긴 사람이다. 홍길주도 마찬가지다. 홍길주는 연암을 평하기를 지식은 산과 같고 문장은 경(經)을 지을만 하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