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史書)에는 1차 사료와 2차 사료가 있다. 1차 사료는 당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사서일 것이며 2차 사료는 당대의 유물과 어떤 기록이 있는 묘비명(墓碑銘) 등일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역사가 있는 나라일수록 사서의 멸실과 오류 삭제 가감 등으로 인해 진실의 반영이어야 할 사서가 왜곡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당시대의 가감 없는 반영인 묘비는 많은 것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1920년대부터 60년대 중국의 낙양 지역에서는 수많은 묘비와 무덤이 발굴되고 있다. 낙양 북쪽은 북망산이라 부르는 공동묘지다. 낙양은 당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묘비들 중 한국 사학계를 흥분시킨 유물들이 있다.
'난원경묘지명' '흑치상지' '낙랑부인' '연남생' '부여 융' '의자왕' 등의 묘비명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멸망 후 당나라에 끌려간 망국인들의 후일담을 전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난원경묘지명은 이런 기록이 있다.
- 난원경은 백제인이다. 백제가 망하자 지심주에서 당으로 건너왔다. 그의 성씨는 왕족인데 원래 오환에서 온 성씨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지에서 홍성을 옛날의 지심주라고 했다. 난원경은 백제시대 지금의 홍성에서 살다가 당으로 간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난원경은 조상이 오환에서 나왔다고 한다. 오환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전'의 바로 그 오환이다. 이들 묘비 중 또 하나 중요한 묘비가 있다. '낙랑부인묘비'다.
-부인은 옛날 낙랑국의 이름있는 집안 사람이다.
묘비명은 낙랑을 나라로 기록한다. 옛 낙랑의 이름 있는 집안 출신이란 것이다. 낙랑은 한(漢)나라가 설치한 한 군(郡)인 줄 알고 있던 그간의 인식을 무색케 한다. 이 묘비는 조선 총독부가 주도적으로 발굴했던 낙랑 고분의 하나인 '낙랑왕관묘"에서 나온 왕인(王印)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부여 융과 의자왕 흑치상지의 묘비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역사학의 중요한 사료로 편입될 정도로 모든 묘비명이 중요했다.
이것들 중에서 한국 바둑사를 꾸미는 데 한점 기록을 더해준 묘비가 있다. 바로 연남생의 묘비다. 25사는 고구려에 바둑이 있다고 했다. 위기라고 기록하지 않고 '혁'이라 쓴 탓에 바둑기록이 아니라는 혐의를 받아오던 중에 연남생의 묘비명이 발견되어 반갑다.
연남생은 연개소문의 장자로 고구려 멸망시 대막리지를 지낸 사람이다. 삼국사기는 연남생이 형제들과의 정권 다툼을 벌이다 실패를 하고 자신을 따르는 3만 명의 국내성 군인들을 이끌고 당에 투항, 그들의 선봉에 서서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한 인물로 그려진다. 연남생의 뒷소식은 별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묘비명이 고구려 멸망 후의 소식을 전한다.
-천(연)남생은 개소문의 장자다. 9세에 선인(先人) 15세에 '중대소형'을 거쳐 24세에 장군에 올라 28세에 막리지 겸 삼군 장군에 오르다. 남건 남산과 다투다가 당에 협력하여 당군의 향도가 되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우위대장군 벽국공(卞國公)을 제수받고 식읍 3천호를 받다.
낙양에 살다가 요동 도호부의 관원이 되었다가 그곳 관사에서 46세로 죽어(679) 낙양으로 옯겨와 장사하다.
연남생의 묘비명은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만천하에 보여줌과 동시에 이제껏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남생의 낙양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위대장군에 식읍 3천 호를 지급받았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를 패망시킨 당나라의 최고 책임자였였던 '이적'의 상훈을 능가한다. 이적도 식읍 3천 호는 받지 못했다.
남생의 투항이 당나라로서는 대 고구려 전쟁의 최대 승기였다는 반증이다. 연남생은 고구려의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막리지에서 적국의 선봉을 자청하고 칼을 거꾸로 잡았던 희대의 반역자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세주다. 연남생의 묘지명은 20여 자나 되는 장황한 관직명 아래에 그의 인물평을 기록하고 있다.
-검술과 활쏘기 바둑에 능했다.
연남생이 검술에 능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24세에 고구려의 대장군에 군림했던 그가 아닌가. 그는 글쓰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다는 것일까. 고구려에는 공식적으로 태학이 있어 6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남생은 바둑과 거문고 두 가지를 즐겼다고 했다. 바둑과 거문고는 백제 신라에도 공히 퍼져 있던 기예였다.
화랑세기에는 탄금위기(彈琴圍碁)라고 했다. 신라의 유력자 용춘공이 별궁에서 다섯 명의 여자들의 수발을 받으며 거문고와 바둑으로 여흥을 삼는다 했으니 남생의 호사스런 생활의 반영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멸망시기를 담담하게 기록한다. 남생의 뒷 소식을 전하는 것은 구차하다 생각한 것일까.
연남생은 삼국사기에도 기록하지 않은 자신의 망명지의 생활을 자신의 묘비명에 가감 없이 쓰고 있다. 내용은 고구려를 당에 팔아먹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선을 일본에 팔았다는 이완용은 차라리 애교다. 이런 인물이 요즘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역사 드라마 등에서는 고뇌하는 지도자로 부활(?)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완용도 고뇌하던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일까.
연남생은 죽은 사람이다. 이미 역사가 된 사람인 것이다. 이 장에서 그의 인물관을 가늠하자는 것은 아니다. 바둑사를 쓰면서 그가 한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가는 부차적인 일이다. 그저 그의 묘비명 속에서 바둑이란 한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반가울 뿐이다. 위대한(?) 인물은 죽어서도 무엇인가를 말한다. 고수(高手)는 죽어도 그의 수법은 전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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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만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