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자유의 산물이라는 후지사와의  감상적 표현은 낭만파 바둑의 마지막 계보로 멋과 감성이 깃든 말이다. 섭위평은 바둑은 근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로 후지사와의 한가함을 지적한바 있다. 중국에서 태동하여 일본에서 초석을 다져 한국에서 꽃을 피운 동양 바둑의 공감각을 풀어놓는 그들에게 조훈현은 불쑥 선혈의 한 마디를 던진다.

한때 4천왕으로 불리던 한국바둑의 준재들이자 세계 바둑의 동량인 이세돌 송태곤 최철한 박영훈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조훈현은 '승부 호흡을 안다'라 답한다. 귀의 정석과 포석 전투력과 수읽기 끝내기 등 바둑수의 평가의 수많은 가치 척도를 도외시 하고 조훈현은 승부 호흡을 아는 기사들이라 평가를 내린 것이다. 바둑에서 말하는 승부호흡, 나는 이 얘기를 하고 싶다.

본성으로서의 승부

나는 연전에  남당 한원진의 후학이 되는 한 학자를 만났다. 그는 충청도 홍성땅에 유혼이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남당의 후학을 자처하며 아직도 자신의 스승 남당계열의 후학 지산 김복한의 사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한원진은 이간과 호락논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호락논쟁은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삶의 굴절을 인물성동이론이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본 양 학파가 끝내 화해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 관계를 절연하며 각기 다른 학파를 이뤄 갈등을 한 사건이다. 이들은 끝내 조선후기 충청도 의병의 대 봉기시 김복한 안병찬의 참여와 동향의 선비인 면암 최익현이 동참하지 않고 호남의병쪽으로 가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의 학파적 양심과 자부심은 이렇게 의병이라는 나라 사랑이란 대의 속에서도 길을 달리한다.

"기를 발해서 이를 성하게 하는 것이 그리도 중했을까요?"

나의 우문에 노학자는 현문으로 답한다.

"이를 성하게 하는 것이 기일쎄."

노학자는 기호학파라는 성리학의 한 학맥의 계보라는 자부심을 내비친다. 알아주지 않아도 그뿐이란 공자의 유훈인가. 조선후기 사상사적 대 논쟁의 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마지막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일 것인가.

승부는 인류가 낳은 가장 현실적인 결과물이다. 인류는 전쟁으로 승부를 가늠해 왔고 전쟁이 아니면 하다 못해 노름판이나 거리의 싸움판에서도 승부를 가늠해 왔다. 전쟁은 인류의 피를 끓게 해왔고 도박과 거리의 싸움은 인류의 승승한 오락으로 더할 나위 없는 종목이었다. 다행히 20세기 문명 속에서 전쟁과 도박 등이 스포츠라는 새로운 도락거리로 옮겨 진행되고 있다. 승부가 인간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된 거다.

승부는 무엇인가

수년전 한 상가에 갔다. 종로패라 불리던 과거의 주먹패였던 김동회 옹의 상가였다. 김동회 옹은 전설의 주먹 김두한의 친구이자 동지로 소공동의 한 커피숍을 사랑방 삼아 80 노협객사를 풍미하다 풍운의 명을 접고 많은 주먹패들의 조문을 받으며 귀천을 했다. 나는 이 노협객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그것은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우미관 바의 조우였다.

알다시피 시라소니는 시대의 파이터다. 그는 조선을 벗어나 북만주 일대를 누비던 맹수였다. 시라소니가 해방된 서울로 들어와 김두한과 한 판 승부를 내자고 종로패의 본거지로 들어온 거다. 이 자리서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모시고 대결을 싱겁게 만들어 버린다. 용쟁호투의 호사를 보려던 세인의 관심을 보기 좋게 외면한 것이다.

김동회 옹이 살아계실 때 나는 이 조우를 물은 적이 있다. 김두한과 평생지기였던 김옹은 무엇인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김옹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단순하게 말했다.

"그날 붙었으면 두한이가 깨졌지. 허나 두서너 해 전에 붙었다면 시라소니고 뭐고 안되었을거야."

김옹은 싸움의 기술보다 정신력을 강조했다. 모든것을 이룬 김두한에게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시라소니는 벅찬 상대였다는 얘기다. 김두한이 아무것도 없을 때는 단 3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 야쿠자 고로에로 패의 40명과 장충단공원에서 겨뤘던 싸움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나는 여기서 당개 윤봉선 옹도 말해야겠다. 윤옹 또한 종로패의 유명 주먹으로 중앙극장의 기도로 있을 때 명동패의 지류인 충무로패의 공격을 받고 40 대 1로 싸운 전설의 주먹이다. 작은 키에 덩치가 좋아 땅개라고도 불리던 윤옹은 40 대 1의 싸움을 싱겁게 설명한다.

"40명이 나를 찾아왔다면 그날이 나의 제삿날이지.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 내가 찾아간 거야. 그들의 아지트로..."

윤옹은 단신으로 충무로의 한 아지트로 찾아가 수명의 상대를 때려눕히고 돌아온 것이 와전 되었다고 정정을 해 준다. 40여 명이 쉬고 있는 합숙소로 손도끼 하나 달랑들고 들어가 미친 황소처럼 날뛰다가 당당히 돌아왔다는 거다.

"돌아오려고 등을 보일 때 싸아 하더라고. 거기서 뒤를 힐끔거렸다간 나는 골로 가는 거지. 깡이 한 번 통한 거야."

윤옹의 말은 싸움은 기세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은 김동회 옹의 말과 상통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액션과 그 액션을 감내할 수 있는 담대함 그것이 바로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란 말이었다.

4천왕에 대한 기대

한 바둑 논객은 이세돌과 최철한 등 4천왕의 바둑을 '경우에 없는 밀어붙이기'라고 했다. 무조건 전투에 올인, 나의 집이나 상대의 전술 등과 관계없이 피 터지는 싸움을 통해 상대를 질리게 하거나 함께 흥분하게 해 승부를 얻는다는 거다. 나는 이 말이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조훈현 9단의 승부호흡이란 말을 듣고는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이 사천왕은 80대 노협객들이 실전적으로 습득한 거리의 싸움꾼의 속성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반상에서 벌어지는 돌과 돌의 겨룸에서도 얻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몰골이 송연해졌다. 어찌 저 어린 나이에도 승부사의 피와 기가 만개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대목에서 검은 휘파람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대구 북부지방의 한 사람을 기억한다.

전차식. 자신의 집에 압류 딱지를 붙이러온 집달관의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넣어주었던 전차식의 무지막지한  꼴통 기질이 어느때는 필요한 때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의 4천왕의 경우와는 판이한 비유지만 저돌적인 정신이 대업을 이룰 때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승부는 마지막 살아 남은 자가 승리자다. 이렇게 보면 세계 바둑사에서 차지하는 오늘의 한국 바둑은 한마디로 실전과 기질의 승리라 말할 만하겠다. 그렇다. 우리는 자만(?)을  털어내고 우리의 것을 잘 살려 끝까지 살아남아 세계바둑을 선도하는 주도국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