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사람 육상산(1139-1192)은 소년시절 천장에 있는 하도(河圖)를 보고 바둑을 깨우쳐 고수가 되었다 했다. 이것을 당나라 사람 임응룡은 1525년에 2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바둑책을 만들어 바둑인으로는 처음으로 바둑과 주역의 관계를 언급했다. 임응룡은 또 다른 연구가 '이정복'이 말한 바둑은 용성공(황제의 스승)이 역법(歷法)에 따라 만든 것이란 설을 들어 바둑과 주역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러나 임응룡은 바둑이 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하며 정작 그 논지를 전혀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사기정의'에도 용성이 역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바둑의 기원을 말하는 하도설이나 주역설의 근거를 살펴보면 유치하기 그지 없다. 요순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4천년 동양사와 역사를 함께 해온 바둑이 조잡하지만 하도설이니 주역설이니 하며 동양사와 보폭을 맞춰온 것은 바둑 속에 무엇인가 의미가 있다고 믿은 동양의 사고(思考)의 반영일 것이다.

둥근것은 우주다. 시간의 고향이다.

모난것은 땅이다. 만물의 근원이다.

이 말은 동양사상의 최고봉인 주자의 우주관이다. 주자의 우주관은 유교의 정리이자 유교의 완성이다. 주자는 우주 자연의 운행 구조 속에 인간의 성리(性理)가 녹아 있음을 간파하고 우주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3차원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우주 속에서 시간을 발견한 인간이 易과 歷을 발견하고부터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주자의 생각이다. 둥근것과 모난것 속에서 우주 자연의 질서를 본 동양사상의 진면모다.

들마루 위에 바둑판을 내 놓는다. 19로 바둑판 위가 여름밤 하늘의 별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계절은 이미 가을이지만 날씨는 아직도 후덥지근하다. 
다시 바둑판을 본다. 지금 바라보는 바둑판은 하북성 망도에서 발견한 '동한' 시대의 17줄 바둑판은 아니나 2천년 시간 속에서 저쪽과 이쪽의 모습을 단 두줄의 변화로 보여 준다.

망도 17줄 바둑판보다 앞서는 문헌 기록은 없다. 선진 시대의 박혁이 바둑이 아니란 것이 밝혀진 이상 가장 오랜 문헌은 '서한' 시대의 양웅(梁雄)이 지은 '방언'의 기록이나 조식(趙湜 192-232)의 기국정교(碁局程較)다.

조식이나 양웅은 모두 '박물지'에서 기록의 연원을 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박물지는 그때의 책이 아니다. 바둑의 기록도 실려 있지도 않다. 그래서 설문해자가 중요시 된다. 설문 해자는 위기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선진 시대에도 바둑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역사의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이 갑골문의 시대다. 그 다음은 결승문자의 시대일 것이다.

바둑판은 방괘(方罫)다. 네모진 모양이다. 그 위에 흑백돌 하나씩을 올려 놓는다. 바둑알은 원(圓)자다. 둥근 것이다.

결승문자의 흔적은 갑골문에서 불과 수십 자다. 玆 午 弗 南 東자 등이다.
오(午)나 불(弗)은 노끈으로 물건을 묶은 모양이다. 남은 밧줄에 토기를 매달아 놓은 모양이다.
동(東)자는 물건이 가득한 자루의 양끝을 노끈으로 묶은 모양이다. 남쪽을 설문은 초목이 무성한 곳이라 했다. 봄인 것이다. 동쪽은 태양이 뜨는 곳이다. 바둑판의 4화점은 동서남북의 4방위다. 한자인 동서남북은 한반도에 들어와 4방향을 특정하는 문자가 되었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東西南北을 동서남북으로 읽었을까? 백제어를 평생 연구한 도수희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東-사.
西-(?).
南-앞.
北-뒤.

삼국시대 한반도 사람들은 東이라 쓰고 사로 읽었단다. 사벌(경주), 사비(부여도 백제로 보면 동쪽에 치우쳐 있다) 사가 서로 변한 것은 음운현상이란다. 東京. 東原이라 쓰고 사벌 사원(비)로 읽었다는 것이다.

선진 시대 중국인들은 위기(圍碁)를 '웨이치'로 읽었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백제어 연구는 '울기'라 했단다. 일본의 '이고'와 비슷하다.

서(西)는 갑골문에서 새의 둥지를 뜻한다. 해가 지면 새가 둥지로 돌아오는 것을 착안한 고대인들의 발상인데 삼국시대의 서쪽을 말하는 우리말은 아직 불명이다.

북(北)은 두 사람이 등을 등지고 있는 모양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뒤라 읽었다. 뒤의 반대어는 앞이다. 앞과 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말의 연원은 놀랍게도 삼국시대까지 올라 간다.

위기는 삼국시대에 이미 들어 와 있었다. 처음에는 '울기'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사람들은 일본과는 다르게 우리의 말로 위기를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한반도에는 이두 문자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바둑을 삼국시대 표현으로 쓰면  파리(波利), 해등(海等)이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이것을 오늘의 바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흑백돌을 주목한다. 흰색과 검은색의 조합은 알록달록이다. 바둑 무늬, 즉 알롱-개 등이 출현한다. 조선초기 '훈몽자회'에 알롱개가 나온다. 바독(바둑)이란 말도 보인다. 언어 학자들은 바둑이 중세어라 말한다. 바둑이란 말이 정식으로 쓰인 것은 고려후기부터란 뜻이다.

웨이치와 이고로 변하지 않고 읽고 쓰는 중국 일본과 달리 기어이 바둑이란 독창적인 표현을 찾아 쓴 개성 강한 민족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바둑판을 아예 탑 속에 넣는 복장물(공양물)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제천의 칠전리 석탑 속에서 바둑판의 파편이 나온 바 있다. 중국의 온갓 불교 경전 에서 바둑을 금기시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식이다.

충남의 봉곡사 본존물 복장품에서 나온 발원문 속에도 바둑판을 뜻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중국과 바둑의 인식이 달랐다.

다시 바둑판을 본다. 사방이다. 바둑알은 둥굴다. 이런 형상을 보고 하도니 낙수니 하며 역법(歷法)을 억지로 짜 맞추지는 말자. 다만 바둑판이 우리의 세계관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면 족할 것이다.

밤이 깊어 간다. 바둑판 위에 이슬이 내린다. 산속에 새벽이 오고 산등선으로 태양이 뜬다. 고대인들은 해뜨는 곳으로 모두 나와 하루를 시작했단다. 무리 중(衆) 자를 설문은 많은 사람이 해를 맞이하는 모습이란다. 고대인들이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만든 것이 바둑이란 대만의 학자도 있다. 믿기지 않지만 연원을 찾아볼 필요는 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