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그 사람

저곳 동쪽 언덕을 바라보네.

새파란 솔잎 우거졌지.

저 솔잎 따다 삶아서

주린 나의 창자를 요기라도 할까.

바라보니 하늘 저 끝.

어두운 마음 첩첩한 구름을 닮았거늘

백이숙제의 절개를 누가 흉내내리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던 일.

백이숙제를 삶속에서 자처했던 사람이 있다. 어린 임금이 무도한 정치에서 물러나 청령포 외딴곳에 부처를 당하자 어린 임금이 사는 곳이 바라보이는 강언덕에 초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문안을 드린다. 이사람의 이름이 원호(元昊).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원호는 높은 벼슬은 아니었으나 선비에게 주어진 충의의 덕목을 지키고자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가 내려다 보이는 산속에 들어가 흙으로 대(臺)를 쌓고 나무로 얼기설기 정자를 지어 관란(觀瀾)이라 하고 산을 갈아 채소를 길러 다발다발 묶어 강하류로 떠내려 보내 혹시 어린 임금이 먹을수 있을까 하는 충심을 보인다.

원호는 단종이 죽자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른 후 울면서 자신의 고향 원주로 내려가 두문불출한다. 원호가 백이숙제에 비교된 이유다. 정조 때 사람인 '서유린'은 시장(諡狀)에 원호를 이렇게 추억한다.

- 단종이 물러나 영월로 갈 때 공도 살던 집 원주에서 영월로 옮겨 초막을 짓고 관란이라 했으며 채소를 키우고 살았다. 단종이 승하하자 삼년상을 치르고 원주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방에서 마당으로 나오지 않았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다. 앉을 때는 동쪽을 보고 앉았고 누울 때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다. 장릉(蔣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원호는 세조의 부름을 여러번 받는다. 그러나 일체 응답을 하지 않았다. 세조의 부름에 구구절절 답서를 보낸 '김시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김시습은 효령대군의 청으로 세조의 불경사업을 돕기도 했고 세조의 공적(?)을 추앙하는 글을 여러 편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원호는 오불관언이었다. 원호는 영월신씨에게서 4남1녀를 두었는데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 글을 읽지 말라는 것이었다. 따져보면 원호가 김시습과 생육신의 반열에 든 것도 이상한 일일 정도다. 세조도 이런 원호를 더이상 압박하지 않는다.

원호의 호는 관란이다. 관란은 난가견(爛柯見) 즉 바둑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원호는 왜 자신의 호를 난가견이라 한 것일까. 원호가 바둑을 이해하고 즐겼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기록이 일천하고 이렇다할 문집도 없다. 그러나 원호의 은거지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원호가 초막을 짓고 단종의 마지막을 지켜본 곳이 기국암(碁局巖)이다.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고 하늘로 돌아간다는 전설이 있는 언덕 위에 초막을 지었던 것이다. 원호의 사적을 기록한 '원호집'에 관란정도(觀爛亭圖)가 있는데(아래사진) 정자와 비각 그리고 먼곳에서 바라본 청령포의 파노라마가 아스라하다. 그 속에 기국암이 선명하고 정자도 보인다.

인적 없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과 산짐승뿐이다. 이 적멸의 고독속에서 얼음 같은 생을 살다간 원호, 그 사람이 깔고 앉았던 바둑바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를 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