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산(1736-1836) 선생의 책을 꺼내든다. 선생은 백성들의 삶을 중하게 생각했고 나라의 법을 존중하셨다. 그것은 선생의 철학이자 사상이었다. 선생은 나라의 옛것을 살펴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주창을 목이 쉬도록 외치고 글로 남기셨다(以重民生以尊國法新我之舊邦).

선생은 목민심서에 바둑을 몇 줄 말하셨다. 이 대목을 보고 몇몇 바둑인들이 선생의 바둑에 대한 몰이해로 치부했지만 사실 선생은 누구보다 바둑을 좋아했고 즐기셨다. 선생은 바둑에 대한 글을 이십여 편 남기셨는데 하나같이 바둑에 대한 의미있는 것들이다.

나는 선생의 시문 중에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를 보고 유야산릉(幽夜山陵)을 떠올렸다. 유야산릉은 '상군서(商君書)'에 나오는 말이다. 상군서는 오늘의 하잘것 없는 것도 내일의 큰것이 되는 법을 말하지만 한편으론 진실 앞에 눈을 감은 맹아의 무지를 말하기도 한다.

- 오늘 들판을 어지럽히는 꽃씨도 바람을 만나면 천 리를 간다. 바람의 기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천 길이나 되는 물속 깊이를 척척 알 수 있는 것은 돌에 줄을 매달아 깊이를 재보았기 때문이다. 기세를 아는 사람은 천 리를 가고 수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물속의 깊이도 알 수 있다. 어둠이 깊으면 거대한 산도 보지 못한다. 아무리 눈밝은 사람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날이 밝고 해가 뜨면 하늘의 새도 가을의 한 터럭 깃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해의 기세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今夫飛蓬遇標風而行千里乘風之勢也.深淵者知千認之深懸繩之數也. 故託其勢者 唯遠必至 守其數者 唯深必得 今夫幽夜 山陵之大 而離婁不見. 淸朝日端則上別飛鳥 下察秋毫 故目之見也. 託日之勢也.)

상군서는 군왕의 치도를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때로는 미망에 갈피를 못잡는 사람들에게 조명을 쪼여 준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조잡하다. 등판에 깔개를 메고 사는 노숙자도 정나라 동문 앞에 서서 상가지구(喪家之狗) 신세를 자임하던 공자도 예외는 아니다.
상군서는 오늘의 만족을 경계한다. 하잘것 없는 꽃씨도 바람을 만나 천 리를 간다고 하지 않는가. 기세를 탄다는 것, 바둑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둑인은 한번쯤 되새겨 볼만한 말이다.

다산 선생은 71세 되시던 해 여주강가에 살면서 5년여를 바둑과 함께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선생은 바둑으로 한번도 진 적이 없다 하셨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선생이 71세 되시던 해(1831년) 쓰신 시다.

老人一快事 /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운 일이란
時與賓朋奕 / 수시로 벗들과 바둑 두는 일이라
必求最拙手 / 반드시 가장 하수를 찾고
掉頭避强敵 / 강한 상대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行其所無事 / 탈나지 않는 곳으로 행마를 하니
恢恢有餘力 / 얼마든지 여유가 있기 마련
業道求賢師 / 기력을 높이자면 현명한 스승을 구하고
學算就巧曆 / 수학을 배우자면 산술인에게 가야 하리라
實事宜躋攀 / 내실 있는 일이야 실행함이 당연하나
虛嬉貴閑適 / 놀이는 한적함을 귀히 여기거늘
何苦對勍寇 / 어찌 고통스레 강적을 마주하여 
自取遭困阨 / 스스로 곤혹을 당하리오.
一念射蜚鴻 / 활로 큰새를 쏘아 맞히 듯
猶然不敗績 / 상대에게 패하는 일 없으니 
恒以逸待勞 / 언제나 편안하게 두어 이기니
怡然順無逆 / 기쁨과 즐거움이 거역을 하랴.
頗怪世上人 / 요상타, 세상 사람들은
志趣乃乖僻 / 취미가 어그러지고 편벽되어
於德悅卑諛 / 덕은 낮고 아첨함을 좋아한다
庸愚充上客 / 어리석은 자를 상객으로 앉히고
於戲不自量 / 바둑수도 제 힘을 못 가려
國手思對席 / 국수를 서로 청해 대국을 생각하다니
聊以送炎曦 / 여름에 아침 햇빛을 다보내고 나서야
精進竟何益 / 이제와 정진한들 (기력)이 늘까.

선생은 오랜 유배생활에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셨다. 더이상 볼 책도 고민할 것도 없는 경지에서 선생은 바둑을 일대사를 마친 장부의 마지막 즐거움이라 말씀하신다. 선생은 늙은 것이 행복이라 하신다. 대머리가 되니 머리가 시원하고 이가 다 빠지니 치통 걱정 없다 하셨다. 눈이 어두워 독서할 걱정 없고 귀가 어두워 시비할 대상 없다 하신다. 조선사람으로 조선의 시를 쓰니 기쁘고 날마다 하수를 불러 바둑으로 이기는 즐거움을 아시냐고 물으신다.

그러셨다. 선생은 젊은날 바둑수에 개의치 않다가 늙은 나이에 그것을 궁구하기가 멋쩍으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 시 속에 바둑의 묘리를 애써 외면하다가 고수가 되지 못한 소회를 풀어 놓고 계시다. 선생은 공(公)에서 바둑을 경계하셨지만 사(私)에서는 바둑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하수들과 두는 바둑이 재미있을까. 하수인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상수들은 너무 인색(?)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