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落下生 悼亡.

조선의 한때 24년간을 유배를 살았던 사람이 있다. 죄명도 기실은 별거 아니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천주교를 믿고 서양에 국내의 사정을 곡해(?)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전부다. 낙하생 이학규는 김해에서 유배를 살며 15년 되던 해 아내의 부음을 듣고서 서러움도 잊었다는 '도망'이란 시를 남긴다.

何恨風臺興月樓. 登臨猶自淚潛流. 傷心小別三天界.

屈指相思十五秋. 地下定無書報恨. 人間惟酒鎖憂.

向來一語分明記. 長病長貧兩白頭.

몇 번이나 바람 부는 언덕, 달 뜨는 루각에 올랐던지요.

오를 때마다 흐르는 눈물 어쩌지 못했답니다.

떠나올 때 삼천대천 세계로 가듯 아팠었지요.

헤아려보니 벌써 열다섯 해.

저 세상에 편지 전할 길 없고

나혼자 술추렴에 처량합니다.

지난날 우리 나누던 말 기억합니다.

늙고 가난해도 백두가 되도록 함께 하자던.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해석이 오히려 구차하다. 이학규는 '도망' 한 수로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기약 없는 유배, 가난하고 고단한 살림과 허약한 몸, 거기에 입만 열면 욕을 퍼붇는 사람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는 상황은 그의 행동 반경을 옥죄었다. 이학규는 그런 수모를 당하며 밤이면 모기 벼룩들과 전투를 치르고 한 잠도 자지 못한 패잔병(?)의 혼몽한 상태로 강진에 유배를 와 있던 정약용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탄을 한다.

-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요.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내가 사람일 수 있으며 글을 아는 인사라 하겠는지요.

이학규는 절망 자체를 다산에게 가감 없이 털어 놓고 있다. 그가 다산과 연결된 것은 '이가환'이 외삼촌이고 '황사영'이 외종형인 그의 가족 관계 때문이었다. 이들은 모두 천주교의 동조자거나 주변인 이었다. 다산도 이학규에게 도움은 못되었다. 다산도 자기 코가 석자였던 탓이겠다.

보통 사람들은 이학규나 다산 같은 입장이면 스스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자의식(自意識)을 잃어버린 서생은 썩은 과일이나 같다. 그러나 이학규나 다산은 이 절망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한 숨인 자의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의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알아주는 것,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스스로를 위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래도 세상에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오만(?), 바로 그것이다.

이학규는 말 없는 말로 그렇게 말했다. 유배에서 풀린 이학규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낯설은 며느리와 처음 보는 손자, 기왓장마저 벗겨지고 쓰러지는 옛집의 살풍경이 전부였다. 이학규는 몇년을 더 살다 죽었고 세상은 철저하게 그를 잊었다. 그런 그가 다시 부활을 하고 있다. 죽은 지 2백년 만이다. 얼마전부터 그의 행적이 몇몇 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학규는 '낙하생집' '물명유해'라는 책을 남겼다.

그 속에 바둑시 한 편과 바둑평이 한 편 수록되어 있다.  이학규는 바둑을 수투(手鬪)라고도 했다. 한  판 바둑에 만 냥을 버리고 호기롭게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보았다 증언한다.

勿爭執白 俗謂手高執白 又謂年長執白 /甚有蹠輕抹口 低死爭執 余謂得勝者 爲

高手受人敬禮者 爲年長必不當以執白爲優也. /勿好勝喉怒 本爲韶遺 反興拂怒

甚有提坪撲樞 反目...

이학규는 바둑에 다섯 가지 금도가 있다고 한다. '비수'가 있다고 하는 것, 자칭 고수라 하는 것, 흰돌을 다투는 것, 승부에 화를 내는 것, 남을 기망하여 승리를 하는 것이 바둑을 두는 데 있어 피해야 할 금도라는 것이다. 잠시 저 문장을 해독해 보자.

- 흰돌 잡는 것을 다투지 마라. 세상 말에 흰돌을 잡는 것이 고수라 하고 연장자가 흰돌을 잡는다 하며 서로 흰돌을 잡으려 핏대를 세우며 싸운다. 내가 볼 때 이기는 사람이 고수고 공경과 예의를 아는 사람이 연장자인(?) 것이니 흰돌을 잡는 것이 자랑이 아니다.
승부에 화낼 것 없다. 바둑은 본래 즐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화내고 바둑판과 돌통까지 내동댕이를 치며 눈을 부라리며 욕설까지 한다.

이 말은 오늘날의 인터넷 바둑을 고스란히 말하고 있다. 바둑의 속성은 역사 속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학규의 이 문장은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박지원의 문장이 이렇다. 이학규가 본 조선 시대의 바둑은 시장판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간의 저쪽으로 한 발만 들여 놓으면 낙하생 이학규가 바둑을 말한다. 구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학규의 묘사는 바둑평에 다름 아니다.